목차
동학농민 전쟁
1. 서론
2.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3. 제1차 기병
4. 집강소 시기
5. 전주화약이후의 국내외의 정세변화
6. 제2차 기병
7. 결론
참고서적
1. 서론
2.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3. 제1차 기병
4. 집강소 시기
5. 전주화약이후의 국내외의 정세변화
6. 제2차 기병
7. 결론
참고서적
본문내용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투쟁에 가담하기를 꺼려 남접의 행동에 반대하였다. 북접 상층간부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게 되자 남접과의 갈등은 보다 더 격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동학의 중도파인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은 삼례에 주둔한 전봉준을 찾아 남북접의 갈등해소에 대해 그의 찬성을 얻은 후 보은으로 북접의 최시형을 찾아갔다. 여기서 오지영은 최시형에게 남북접의 갈등해소를 거듭 촉구하자 북접의 지도층도 이에 호응하여 공동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전봉준의 북상에 비협조적이었던 김개남은 49일을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참서의 내용을 핑계로 남원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손화중은 합세하려다가 일본군이 서해안으로 칩입한다는 정보를 따라 광주와 나주를 방비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을 거쳐 공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공주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의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화력과 신형 무기앞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서 후퇴하게 되었다. 특히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의 피해가 가장 커서 생존자가 500명 미만 밖에 남지 않았다.
패배의 원인이야 많겠지만 우선 농민군이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정부군과 일본군에 시간을 벌어주었고 김개남 군대의 비협조등으로 전투력이 반감되었던 이유도 있다. 또한 최신장비가 뒷받침되는 전략·전술의 수립, 이에따른 군사의 신속한 이동 등에서 농민군은 정부·일본연합군보다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은 논산, 원평전투에서 전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연합군에 패하고 마지막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은 연이은 패배로 직속부대만 남기고 기율이 해이해진 농민군을 해산하고나서 재기병의 상황을 점검하고자 직속부대에 다음 지시를 기다리게 하고 믿을 만한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잠해에 들어갔다.
이후 전봉준은 정부군과 일본군이 농민군을 따라 남하한 상태에서는 서울의 방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직속부대를 서울로 잡입하도록 지시한 다음 순창에 들렀을 때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됨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7. 결론
1894년 2월 15일, 고부민란 이후 약 1년간 지속된 갑오농민전쟁은 그 초기에는 지방봉건관리의 불법적인 수탈에 대항하였지만 점차 그 투쟁대상이 중앙의 봉건권력과 침략적인 외세로 옮겨 갔다. 전쟁의 각 단계마다 주요한 공격대상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반봉건·반침략적 성격은 일관되어 나타났다.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봉건체제가 그 모순을 드러내면서 이에 저항하는 민중적 세계가 확대된 결과 민중적인 개혁요구를 수렴하면서 문호개방 이후 부가된 세계사적 모순에 대한 투쟁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농민전쟁이 결국 외세와 그에 결탁한 봉건정부에 의해 좌절된 데에는 몇가지 원인들이 지적될 수 있다. 객관적인 요인으로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여러 계층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농민층과 연대하여 반봉건·반침략적 개혁을 실현시킬 수 없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우금치를 둘러싼 공방전이 최고점에 달할 무렵인 1894년 12월 8일, 농민군은 순 국문으로 된 고시문을 발표하여 일본군이 開花奸黨, 즉 김홍집내각과 결탁하여 조선을 왜국화하려 한다고 규탄하였다.
여기서 당시 위로부터 의도되고 있던 개혁운동은 반농민적인 책동으로 규정되었으며 또한 이를 추진한 개화파들 자신도 비록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범위 내에서 수용하려고 하였지만 결코 농민군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하여 반침략전선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위로부터의 개혁운동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운동은 결합되지 못한 채 외세에 의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농민군 내부의 문제점도 여러가지가 노출되었다. 우선 전반적인 농민군의 의식이 봉건권력의 정점인 왕조 자체의 부정으로까지 이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에 일시적으로 승리한 농민군이 정부측과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농민군의 구성을 살펴볼 때도 약간 상이한 계층적 기반을 가진 집단들이 일시적으로 동일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던 관계로 그 내부에서는 적지않은 이해대립을 보였다. 또 농민군 조직의 근간이 되었던 동학조직 내에서 상층간부와 하층교도들 사이의 견해차이는 농민군의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전쟁수행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내외적인 문제점을 지닌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이나 각종 슬로건에서 보여지는 혁명성은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농민적 토지소유의 확립을 비롯하여 농민층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가장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었으며 이미 해체되어 가고 있던 봉건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정부가 더이상 외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음을 확실히 인식한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반침략전쟁을 전개해 나간 귀중한 경험이었다.
전쟁 자체로는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로 하여금 농민층의 요구를 반영한 갑오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데에서도 갑오농민전쟁이 당시 사회에 끼친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농민전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군의 구성원들은 그 뒤에 일어난 반일의병전쟁이나 英學黨·活貧黨운동 등에도 계속 참가함으로써 반봉건·반침략운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실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민족운동의 최고봉이었으며 한국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즉 , 국내적으로는 봉건적 사회질서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주의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민중의 반침략의지를 보여준 反帝전쟁으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며 식민지하 민족해방투쟁의 전개에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이 보여준 자주적이고 애국적인 반외세적 민족주의 정신은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고 우리 근대사의 항일의병운동에서 3·1 운동으로, 그리고 그 후의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이들 운동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서적
[동학농민혁명과 사회변동 1993, 한울]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1993, 창작과비평사]
이런 와중에 동학의 중도파인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은 삼례에 주둔한 전봉준을 찾아 남북접의 갈등해소에 대해 그의 찬성을 얻은 후 보은으로 북접의 최시형을 찾아갔다. 여기서 오지영은 최시형에게 남북접의 갈등해소를 거듭 촉구하자 북접의 지도층도 이에 호응하여 공동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전봉준의 북상에 비협조적이었던 김개남은 49일을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참서의 내용을 핑계로 남원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손화중은 합세하려다가 일본군이 서해안으로 칩입한다는 정보를 따라 광주와 나주를 방비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을 거쳐 공주까지 진격하였으나 공주에서 정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의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화력과 신형 무기앞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서 후퇴하게 되었다. 특히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의 피해가 가장 커서 생존자가 500명 미만 밖에 남지 않았다.
패배의 원인이야 많겠지만 우선 농민군이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정부군과 일본군에 시간을 벌어주었고 김개남 군대의 비협조등으로 전투력이 반감되었던 이유도 있다. 또한 최신장비가 뒷받침되는 전략·전술의 수립, 이에따른 군사의 신속한 이동 등에서 농민군은 정부·일본연합군보다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은 논산, 원평전투에서 전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연합군에 패하고 마지막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이에 전봉준은 연이은 패배로 직속부대만 남기고 기율이 해이해진 농민군을 해산하고나서 재기병의 상황을 점검하고자 직속부대에 다음 지시를 기다리게 하고 믿을 만한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잠해에 들어갔다.
이후 전봉준은 정부군과 일본군이 농민군을 따라 남하한 상태에서는 서울의 방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직속부대를 서울로 잡입하도록 지시한 다음 순창에 들렀을 때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됨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7. 결론
1894년 2월 15일, 고부민란 이후 약 1년간 지속된 갑오농민전쟁은 그 초기에는 지방봉건관리의 불법적인 수탈에 대항하였지만 점차 그 투쟁대상이 중앙의 봉건권력과 침략적인 외세로 옮겨 갔다. 전쟁의 각 단계마다 주요한 공격대상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반봉건·반침략적 성격은 일관되어 나타났다.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봉건체제가 그 모순을 드러내면서 이에 저항하는 민중적 세계가 확대된 결과 민중적인 개혁요구를 수렴하면서 문호개방 이후 부가된 세계사적 모순에 대한 투쟁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농민전쟁이 결국 외세와 그에 결탁한 봉건정부에 의해 좌절된 데에는 몇가지 원인들이 지적될 수 있다. 객관적인 요인으로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여러 계층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농민층과 연대하여 반봉건·반침략적 개혁을 실현시킬 수 없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우금치를 둘러싼 공방전이 최고점에 달할 무렵인 1894년 12월 8일, 농민군은 순 국문으로 된 고시문을 발표하여 일본군이 開花奸黨, 즉 김홍집내각과 결탁하여 조선을 왜국화하려 한다고 규탄하였다.
여기서 당시 위로부터 의도되고 있던 개혁운동은 반농민적인 책동으로 규정되었으며 또한 이를 추진한 개화파들 자신도 비록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범위 내에서 수용하려고 하였지만 결코 농민군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하여 반침략전선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위로부터의 개혁운동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운동은 결합되지 못한 채 외세에 의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농민군 내부의 문제점도 여러가지가 노출되었다. 우선 전반적인 농민군의 의식이 봉건권력의 정점인 왕조 자체의 부정으로까지 이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에 일시적으로 승리한 농민군이 정부측과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농민군의 구성을 살펴볼 때도 약간 상이한 계층적 기반을 가진 집단들이 일시적으로 동일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던 관계로 그 내부에서는 적지않은 이해대립을 보였다. 또 농민군 조직의 근간이 되었던 동학조직 내에서 상층간부와 하층교도들 사이의 견해차이는 농민군의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전쟁수행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내외적인 문제점을 지닌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이나 각종 슬로건에서 보여지는 혁명성은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농민적 토지소유의 확립을 비롯하여 농민층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가장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었으며 이미 해체되어 가고 있던 봉건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은 봉건정부가 더이상 외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음을 확실히 인식한 민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반침략전쟁을 전개해 나간 귀중한 경험이었다.
전쟁 자체로는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로 하여금 농민층의 요구를 반영한 갑오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데에서도 갑오농민전쟁이 당시 사회에 끼친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농민전쟁을 통해 성장한 농민군의 구성원들은 그 뒤에 일어난 반일의병전쟁이나 英學黨·活貧黨운동 등에도 계속 참가함으로써 반봉건·반침략운동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실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민족운동의 최고봉이었으며 한국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즉 , 국내적으로는 봉건적 사회질서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주의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민중의 반침략의지를 보여준 反帝전쟁으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며 식민지하 민족해방투쟁의 전개에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 되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이 보여준 자주적이고 애국적인 반외세적 민족주의 정신은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고 우리 근대사의 항일의병운동에서 3·1 운동으로, 그리고 그 후의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이들 운동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서적
[동학농민혁명과 사회변동 1993, 한울]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1993,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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