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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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만남

2. 체 게바라의 국가 경영 실험

3. 혁명을 위한 유랑

4. 콩고에서의 실패

5. 레지스 드브레의 변신

6. 체 게바라의 죽음

7. 체 게바라와 제임스 딘

8. 유럽에서 부활한 체 게바라

본문내용

바로 피델이 나를 쿠바 경제 책임자로 임명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 농담쯤으로 들어두게나."
로드리게스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는다. 게바라도 이제 자신의 목숨이 곧 끊어질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가 남긴 건 딱 두마디였다고 한다.
"피델에게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둘은 껴안았고 굳게 약속했다. 로드리게스는 감방을 나와 CIA본부에 무전기로 보고하려는 순간 M2 카빈 소총의 날카로운 총성이 두 발 울리는 걸 들었다고 적고 있다.
7.체 게바라와 제임스 딘
게바라는 죽었다. 그러나 그의 신화는 그때부터 더욱 뜨겁게 살아난다. 그가 죽은 67년 10월부터 1년여 기간은 미국에도 신좌익운동이 거세게 꿈틀대던 시절이었다. 죽은 게바라는 당시 미국 신좌익 운동가들의 7대 영웅으로 게바라와 더불어 알베르트 까뭐. 노암 촘스키, 폴 굿만, 레지스 드브레, 프란츠 파농, 허버트 마르쿠제 등을 꼽고 있다. 서로 다 이질적인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건 특별한 상관은 없다고 본다, 그 잡지 기사의 필자는 한 운동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체 게바라가 남긴 책들은 당시 급진 성향의 대학생들 사이에 널리 읽히는 필독서였다. <게릴라 전쟁>(1961), <쿠바혁명전쟁의 회상>(1963), <사회주의와 인간>(1966), <볼리비아>(1969) 등이 유명하다. 체 게바라는 혁명의 기본적인 원동력이 젊은이라는 점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학생들로부터 더욱 큰 인기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자 엄창현씨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은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중반에 체 게바라의 책이 제법 읽혔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한때 많은 진보적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게바라 신화는 신좌익의 물결이
사라지고, 아니 동구권이 몰락한 지금까지도 살아 꿈틀대고 있다. 95년 말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로부터 6백90킬로미터덜어진 발레그란데시에서는 그의 유골 찾기 작업이 벌어졌는데, 이는 체 게바라 일당 소탕작전에 참가했던 볼리비아의 두 퇴역 장군이 체 게바라가 살해 암장된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다고 밝힌 뒤 정부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볼리비아인들 가운데엔 아직도 게바라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래된 신문지에서 오려낸 게바라의 사진을 모셔놓고 예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산체스 로자다 볼리비아 대통령이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견되면 가족들에게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자, 발레그란데 주민들은 체 게바라의 유해가 발굴되면 체 게바라 기념관을 건립해 보존하겠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게바라에 대해 좋은 기억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볼리비아의 어떤 늙은 농부는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농민들에게 해준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우리를 돕겠다고 했지만 도움을 받을 사람은 그 자신이었을 정도로 초라한 행색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과연 게바라가 해준 일이 무언가? 그러나 신화는 아무건도 해준 게 없더라도 무엇을 할려고 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더 끈질기게 따라붙는 건 아닐가?
신화는 이데올로기마저 흡수해 녹여 버리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오늘의 게바라 숭배자들에게 중요한 건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 같다.
지난 93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그의 일기 <젊은 날의 얘기>는 스테디설러로 2
년만에 12만부가 팔렸는데, 주 독자는 이데올로기를 떠나 기성 정치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이라고 한다. 한 이탈리아 언론인의 다음과 같은 말이 게바라 신화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 같다.
"부패와의 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게바라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해방투사이자 완벽한 도덕 실천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의 제임스 딘과 같은 존재다."
8.유럽에서 부활한 체 게바라
97년은 체 게바라의 사망 30주년이 되는 해다. <신동아> 96년 8월호는 벌써부터 유럽에 '게바라 열풍'이 불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스위스 취리히의 일요 신문인 <존탁스 차이퉁>지는 6월 2일 '불멸의 행진, 68년 세대의 우상 체 게바라, 그에 대한 열광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혁명은 끝났고 공산주의는 막을 내렸는데, 게바라만은 살아 있다."고 단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시위하는 곳에는 1967년 살해된 '사령관' 게바라가 항상 함께 있다.
수수께께 같은 일이다. 68년 운동의 다른 우상들인 호치민, 마오 쩌뚱, 루디 두취케 등은 이후 세대에게서 잊혀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비교적 오래갔지만 역시 뒤로 밀려났다.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커트 코베인과 같은 대중적인 우상들만 티셔츠와 포스터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
게바라의 사진은 내의, 핀, 포스터로 팔리고 있다 한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의 시계회사 스왓치는 체 게바라의 얼굴 사진이 든 시계를 제작, 판매하고, 영국의 모 맥주회사에서는 '체' 라는 이름의 맥주 시판에 들어갔다. 그의 이미지는 유럽 각국의 디스코 텍, 소형 승용차, 백화점 등의 광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팔리는 게바라의 이미지는 항상 똑같은 모습인데, 그건 긴 머리, 거친 수염, 별이 달려 있는 베레모로 구성되어 있다. 게바라가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 못지 않은 미남이라고 하는 것도 '게바라 열풍'의 무시 못할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것이다. 모든 혁명은 종국엔 부패하기 마련인데, 게바라는 부패할 틈도 없었다. 게바라를 숭배한다는 한 젊은이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다소 유치하게 들릴 망정 게바라가 모든 정치인들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아닌지 모르겠다.
"1965년 게바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 게릴라 투쟁을 벌였습니다. 편안한 장관 자리 대신에 영구 혁명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게바라 외에 누가 이렇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위대한 혁명가들은 모두 자신의 사무실에서 죽어 갔습니다. 카스트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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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4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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