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1876-1967)
2.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Ludwig Erhard (1897-1977)
3.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 Kurt Georg Kiesinger (1904-1888)
4.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1913-1992)
5. 헬무트 슈미트, Helmut Schmidt (1918-1982)
6. 헬무트 콜, Helmut Kohl (1930- )
7. 게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oder (1944- )
2.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Ludwig Erhard (1897-1977)
3.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 Kurt Georg Kiesinger (1904-1888)
4.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1913-1992)
5. 헬무트 슈미트, Helmut Schmidt (1918-1982)
6. 헬무트 콜, Helmut Kohl (1930- )
7. 게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oder (1944- )
본문내용
승부를 거는 그의 정치적 결단력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7.게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oder (1944- )
재임기간 1999- . 모센베르크출생. 헬무트 콜의 16년 간의 독일정치 지배를 종식시킨 인물로 평가 받는 통일독일의 총리. 콜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어 총리가 되었다. 독일노련(DGB) 등 강력한 독일 노조단체들이 1998년 치루어질 총선의 야당 총리후보로 일제히 공개 지지하고 나섰다. 그가 바로 견습생,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를 거쳐 독일 중도좌파의 희망으로 떠오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 보수적 이미지와 깨끗한 용모, 명료한 말솜씨로 높은 대중적인기를 구가하던 니더작센주 총리(주지사) 슈뢰더 였다. 슈뢰더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괴팅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 변호사 자격을 딴 후 정계로 진출해 승승장구해 왔으나, 사생활 면에서의 슈뢰더는 그리 모범적이지 않았다. 두번이나 이혼하고 당시 유력 시사주간지 포쿠스의 정치담당 여기자 도리스 쾨프와 동거 중 이었다. 세번째 부인과도 정식 이혼하더니 이혼 22일만에 그동안 동거 관계이던 시사주간지 포쿠스의 여기자 도리스 쾨프와 전격적으로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슈뢰더와 사민당은 실업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있는 헬무트 콜 총리와 집권 연립여당을 크게 앞지르고 있었다. 안정을 상징했던 헬무트 콜(68), 변화를 상징한 게르하르트 슈뢰더(54)를 놓고 1989년 9월 27일 표를 던진 독일인들은 '변화'를 선택했다. 마침내 1999년 슈뢰더는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슈뢰더 후보가 승리한 것은 21세기를 앞두고 '세계 냉전 시대의 지도자들의 퇴장과 신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부상'을 완결지었다는 의미를 가졌다. 슈뢰더는 1944년 모센베르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전선에서 전사하였고, 4형제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17세때부터 도매상의 견습 점원일을 하며 야간고교를 다닐 정도로 고생했다. 뒤늦게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32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고, 1980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야간학교 재학중이던 63년 사민당(SPD)에 가입한 슈뢰더는 전통적 좌파이념에 몰두했으며 정열적인 활동력과 정연한 논리,탁월한 언변을 바탕으로 78년 SPD 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의 의장에 선출됐다. 급진좌파를 자처했고 한때 도시게릴라 적군파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했던 그가 당시 한 토론 중 "그래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라고 한 발언은 아직도 SPD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슈뢰더는 80년 연방하원의원, 86년 니더작센주의회 SPD 원내의장, 90년주총리를 거치면서 이념적 편향에서 탈피, SPD내 온건파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친기업주의, 반외국인 발언, 강력한 범죄퇴치 주장 등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1990년 니더작 센주 지사 당선 이후 8년간 지사직만 지내 독일 정치 1번지로 대변되는 본에는 실력자 친구도 별로 없다. 불우한 성장 환경에다 끊임없는 출세욕, 권력욕, 그리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단독 플레이 성향이 그의 특징이었다. 세번 이혼에 네번 결혼한 경력으로 인해 '플레이보 이 정치인'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정치인의 사생활에 무관심한 독일 국민들의 정서로 잦은 결혼과 이혼이 총선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1950년대 초 실의에 빠진 모친에게 "기다리세요. 언젠가 는 메르세데스-벤츠를 타게 해드릴테니까요"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40년이 지난 1990년 모친의 80회 생일 날 관용차인 은색 벤츠를 타고 어머니의 아파트를 방문 했었다.
7.게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oder (1944- )
재임기간 1999- . 모센베르크출생. 헬무트 콜의 16년 간의 독일정치 지배를 종식시킨 인물로 평가 받는 통일독일의 총리. 콜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어 총리가 되었다. 독일노련(DGB) 등 강력한 독일 노조단체들이 1998년 치루어질 총선의 야당 총리후보로 일제히 공개 지지하고 나섰다. 그가 바로 견습생, 과격한 마르크스주의자를 거쳐 독일 중도좌파의 희망으로 떠오른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 보수적 이미지와 깨끗한 용모, 명료한 말솜씨로 높은 대중적인기를 구가하던 니더작센주 총리(주지사) 슈뢰더 였다. 슈뢰더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괴팅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 변호사 자격을 딴 후 정계로 진출해 승승장구해 왔으나, 사생활 면에서의 슈뢰더는 그리 모범적이지 않았다. 두번이나 이혼하고 당시 유력 시사주간지 포쿠스의 정치담당 여기자 도리스 쾨프와 동거 중 이었다. 세번째 부인과도 정식 이혼하더니 이혼 22일만에 그동안 동거 관계이던 시사주간지 포쿠스의 여기자 도리스 쾨프와 전격적으로 비밀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에서 슈뢰더와 사민당은 실업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있는 헬무트 콜 총리와 집권 연립여당을 크게 앞지르고 있었다. 안정을 상징했던 헬무트 콜(68), 변화를 상징한 게르하르트 슈뢰더(54)를 놓고 1989년 9월 27일 표를 던진 독일인들은 '변화'를 선택했다. 마침내 1999년 슈뢰더는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슈뢰더 후보가 승리한 것은 21세기를 앞두고 '세계 냉전 시대의 지도자들의 퇴장과 신세대 정치 지도자들의 부상'을 완결지었다는 의미를 가졌다. 슈뢰더는 1944년 모센베르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루마니아 전선에서 전사하였고, 4형제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가난한 집안환경 때문에 17세때부터 도매상의 견습 점원일을 하며 야간고교를 다닐 정도로 고생했다. 뒤늦게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32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고, 1980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야간학교 재학중이던 63년 사민당(SPD)에 가입한 슈뢰더는 전통적 좌파이념에 몰두했으며 정열적인 활동력과 정연한 논리,탁월한 언변을 바탕으로 78년 SPD 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의 의장에 선출됐다. 급진좌파를 자처했고 한때 도시게릴라 적군파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했던 그가 당시 한 토론 중 "그래요.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라고 한 발언은 아직도 SPD내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슈뢰더는 80년 연방하원의원, 86년 니더작센주의회 SPD 원내의장, 90년주총리를 거치면서 이념적 편향에서 탈피, SPD내 온건파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친기업주의, 반외국인 발언, 강력한 범죄퇴치 주장 등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1990년 니더작 센주 지사 당선 이후 8년간 지사직만 지내 독일 정치 1번지로 대변되는 본에는 실력자 친구도 별로 없다. 불우한 성장 환경에다 끊임없는 출세욕, 권력욕, 그리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단독 플레이 성향이 그의 특징이었다. 세번 이혼에 네번 결혼한 경력으로 인해 '플레이보 이 정치인'으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정치인의 사생활에 무관심한 독일 국민들의 정서로 잦은 결혼과 이혼이 총선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1950년대 초 실의에 빠진 모친에게 "기다리세요. 언젠가 는 메르세데스-벤츠를 타게 해드릴테니까요"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40년이 지난 1990년 모친의 80회 생일 날 관용차인 은색 벤츠를 타고 어머니의 아파트를 방문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