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3.1독립운동의 각지에로의 파급(波及)
2. 3.1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언론의 보도(報道)와 논조(論調)
3. 3.1운동에 대한 각국의 반응(反應)
4. 소련에서의 3.1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5. 3.1운동과 통일문제
Ⅲ. 결론
무단정치와 3.1운동
Ⅱ. 본론
1. 3.1독립운동의 각지에로의 파급(波及)
2. 3.1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언론의 보도(報道)와 논조(論調)
3. 3.1운동에 대한 각국의 반응(反應)
4. 소련에서의 3.1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5. 3.1운동과 통일문제
Ⅲ. 결론
무단정치와 3.1운동
본문내용
. 무단정치 하에서 조선인민은 병합이래 10년간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완전히 빼앗기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복종만을 강제당하였다.
일본은 무단정치 하에서 식민지지배를 위한 기초를 굳히는 한편, '병합'이전부터 꼬리를 잇는 애국계몽운동 및 반일의병투쟁의 잔존세력을 없애기 위해 정보내사와 검거를 계속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잔존세력을 검거한 사건이 '안악사건'이며 이에 뒤이어 '105인 사건'으로 불리 우는 신민회사건이 일어났다. 105인 사건에서는 사건을 날조하기 위한 고문의 내용이 선교사들에 의하여 외국에 알려지고 특히 미국 언론계에서는 일본의 법치제도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사건 관련자에 기독교신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에 의하여 조선말기 이래의 애국계몽운동은 국내에서는 거의 괴멸적 타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해외에서 형태를 바꾸어 확산되어 갔다. 반일의병투쟁도 '병합'을 고비로 하여 쇠퇴하였으나 1914년까지는 산간오지를 중심으로 분산적인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퇴세를 만회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독립의군부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대한광복회, 조선국권회복단 등 산발적으로 비밀결사가 발각 검거되고 있는데 1915년을 고비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이나 반일의병투쟁과 같은 한말의 국권회복운동은 기본적으로 거의 해소되었다. 1910년대 비밀결사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한말의 반일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 보조를 같이 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북부지역에 무장투쟁의 근거지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것은 '병합'이전에 애국계몽운동이 무장투쟁을 부정하고 실력양성을 우선하여 반일의병투쟁에 비판적, 부정적이었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국내의 무단정치하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저항조직을 결성하고 그것을 확대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극히 곤란하였다. 일본의 지배가 미치지 않으면서도 조선에 가장 인접한 북부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근거지를 만드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를 가장 일찍 제기한 것은 최익현과 함께 한말의 유학계를 대표하는 위정척사론자이며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인석이었다. 신민회는 도만계획을 굳히고 서간도의 삼보원으로 그 근거지를 삼았다. 그러나 신민회에 의한 근거지 건설은 여러 가지 곤란을 수반하였다. 조선인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고, 일본측의 민족이단책동과 압력에 의하여 중국관민과의 충돌이 끊임없었던 것이다. 교섭에 의해 권리확보에 노력하고 종래의 건전농업을 수전농업으로 바꾸어 생활을 안정시키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사업의 중심은 신흥학교에 의한 독립군과 민족간부의 양성이었다. 북간도에도 국내로부터 의병과 망명자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북간도지역에서도 민족교육이 계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북간도의 초기 민족운동단체는 종교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던 점이 주목되는데 대한국민회는 기독교적 민족주의 단체였으나 중광단은 대종교계의 민족주의단체였다. 서간도 및 북단도의 근거지 건설이 토대가 되어 3.1운동 후 서간도에서는 부민단을 발전시킨 한족회를 중심으로 서로군정서가, 북간도에서는 중광단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가 각각 조직되어 중국 동북지방 독립군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전쟁이었으나 그 와중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고 세계사상 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하였다. 10월혁명은 제국주의 내의 혁명운동,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리고 미대통령 윌슨은 동맹국측(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던 여러 민족들의 민족자결을 제창했는데 이는 윌슨의 의도를 벗어나 연합국측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의 민족운동도 자극하였다. 3.1운동을 국내에서 점화시킨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도경유학생의 궐기였다.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독립선언서,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채택하고 이를 발송하였다. 이 운동은 탄압을 받았고 그 후 많은 학생들이 국내의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각각의 운동계획을 연합하기 위하여 여러 번의 회합을 가졌고 여기에 불교대표와 학생들도 합류하게 되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운동 자체로부터 탈락하고 그 대신 학생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종교대표들은 무단정치하의 엄혹한 조건 속에서 운동의 계획과 준비, 세 종교대표에 의한 각각의 교도대중에 대한 영향, 종파를 초월한 연합전선 형성에 의하여 학생 중심의 운동이 대중운동과 결합항고 나아가서 지방으로 파급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3.1운동은 당초부터 평화적 시위운동으로 그칠 수는 없었다. 운동이 지방으로 파급됨에 따라 헌병, 경찰, 군대까지 출동하여 각지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조선북부에 집중되고 있던 시위운동은 점차 남부조선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3.1운동은 당초 도시를 중심으로 한 소요가 가장 맹렬한 지구로부터 점차 벽지, 원격지로 파급되고 있었다. 일본측은 이 운동을 내외에 대하여 극히 경미한 문제로 다루고 실제에 있어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일본군경에 의한 유혈 탄압에 대하여 운동도 점차 폭력화하였다. 대중적인 시위와 봉기는 기본적으로는 4월말까지 이루어졌고 그 후에는 점차 산발적인 테러 및 지하활동으로 전화해갔다. 3.1운동은 농업인, 학생, 상업인, 여성 등으로 전국적이고도 전군중적인 운동이었다. 3.1운동은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고 조선인이 이주한 모든 지역에서 서로 연관되어 일어난 총체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간도지방의 3.1운동은 군중적인 집회와 시위로부터 1920년대의 독립군운동에 직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1운동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보면, 한말까지의 동학계의 갑오농민전쟁, 위정척사계의 반일의병투쟁, 개화파계의 애국계몽운동 등 여러 조류들이 무단정치하에서 합류한 운동이며, 1920년대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운동의 기점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가지 조류로 나뉘는데 이 두 가지 조류는 계급적 입장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한결같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제1차적 과제로 하여 활동해 갔다.
일본은 무단정치 하에서 식민지지배를 위한 기초를 굳히는 한편, '병합'이전부터 꼬리를 잇는 애국계몽운동 및 반일의병투쟁의 잔존세력을 없애기 위해 정보내사와 검거를 계속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잔존세력을 검거한 사건이 '안악사건'이며 이에 뒤이어 '105인 사건'으로 불리 우는 신민회사건이 일어났다. 105인 사건에서는 사건을 날조하기 위한 고문의 내용이 선교사들에 의하여 외국에 알려지고 특히 미국 언론계에서는 일본의 법치제도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사건 관련자에 기독교신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에 의하여 조선말기 이래의 애국계몽운동은 국내에서는 거의 괴멸적 타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해외에서 형태를 바꾸어 확산되어 갔다. 반일의병투쟁도 '병합'을 고비로 하여 쇠퇴하였으나 1914년까지는 산간오지를 중심으로 분산적인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퇴세를 만회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독립의군부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대한광복회, 조선국권회복단 등 산발적으로 비밀결사가 발각 검거되고 있는데 1915년을 고비로 하여 애국계몽운동이나 반일의병투쟁과 같은 한말의 국권회복운동은 기본적으로 거의 해소되었다. 1910년대 비밀결사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한말의 반일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 보조를 같이 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북부지역에 무장투쟁의 근거지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던 점이다. 이것은 '병합'이전에 애국계몽운동이 무장투쟁을 부정하고 실력양성을 우선하여 반일의병투쟁에 비판적, 부정적이었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국내의 무단정치하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저항조직을 결성하고 그것을 확대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 극히 곤란하였다. 일본의 지배가 미치지 않으면서도 조선에 가장 인접한 북부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근거지를 만드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를 가장 일찍 제기한 것은 최익현과 함께 한말의 유학계를 대표하는 위정척사론자이며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인석이었다. 신민회는 도만계획을 굳히고 서간도의 삼보원으로 그 근거지를 삼았다. 그러나 신민회에 의한 근거지 건설은 여러 가지 곤란을 수반하였다. 조선인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고, 일본측의 민족이단책동과 압력에 의하여 중국관민과의 충돌이 끊임없었던 것이다. 교섭에 의해 권리확보에 노력하고 종래의 건전농업을 수전농업으로 바꾸어 생활을 안정시키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그 사업의 중심은 신흥학교에 의한 독립군과 민족간부의 양성이었다. 북간도에도 국내로부터 의병과 망명자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북간도지역에서도 민족교육이 계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북간도의 초기 민족운동단체는 종교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던 점이 주목되는데 대한국민회는 기독교적 민족주의 단체였으나 중광단은 대종교계의 민족주의단체였다. 서간도 및 북단도의 근거지 건설이 토대가 되어 3.1운동 후 서간도에서는 부민단을 발전시킨 한족회를 중심으로 서로군정서가, 북간도에서는 중광단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가 각각 조직되어 중국 동북지방 독립군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식민지 재분할을 위한 제국주의전쟁이었으나 그 와중에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고 세계사상 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하였다. 10월혁명은 제국주의 내의 혁명운동,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리고 미대통령 윌슨은 동맹국측(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던 여러 민족들의 민족자결을 제창했는데 이는 윌슨의 의도를 벗어나 연합국측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의 민족운동도 자극하였다. 3.1운동을 국내에서 점화시킨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도경유학생의 궐기였다.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독립선언서,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채택하고 이를 발송하였다. 이 운동은 탄압을 받았고 그 후 많은 학생들이 국내의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각각의 운동계획을 연합하기 위하여 여러 번의 회합을 가졌고 여기에 불교대표와 학생들도 합류하게 되었다.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운동 자체로부터 탈락하고 그 대신 학생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종교대표들은 무단정치하의 엄혹한 조건 속에서 운동의 계획과 준비, 세 종교대표에 의한 각각의 교도대중에 대한 영향, 종파를 초월한 연합전선 형성에 의하여 학생 중심의 운동이 대중운동과 결합항고 나아가서 지방으로 파급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3.1운동은 당초부터 평화적 시위운동으로 그칠 수는 없었다. 운동이 지방으로 파급됨에 따라 헌병, 경찰, 군대까지 출동하여 각지에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조선북부에 집중되고 있던 시위운동은 점차 남부조선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3.1운동은 당초 도시를 중심으로 한 소요가 가장 맹렬한 지구로부터 점차 벽지, 원격지로 파급되고 있었다. 일본측은 이 운동을 내외에 대하여 극히 경미한 문제로 다루고 실제에 있어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일본군경에 의한 유혈 탄압에 대하여 운동도 점차 폭력화하였다. 대중적인 시위와 봉기는 기본적으로는 4월말까지 이루어졌고 그 후에는 점차 산발적인 테러 및 지하활동으로 전화해갔다. 3.1운동은 농업인, 학생, 상업인, 여성 등으로 전국적이고도 전군중적인 운동이었다. 3.1운동은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고 조선인이 이주한 모든 지역에서 서로 연관되어 일어난 총체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간도지방의 3.1운동은 군중적인 집회와 시위로부터 1920년대의 독립군운동에 직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1운동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보면, 한말까지의 동학계의 갑오농민전쟁, 위정척사계의 반일의병투쟁, 개화파계의 애국계몽운동 등 여러 조류들이 무단정치하에서 합류한 운동이며, 1920년대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운동의 기점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가지 조류로 나뉘는데 이 두 가지 조류는 계급적 입장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한결같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제1차적 과제로 하여 활동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