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목화씨 도입의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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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문익점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공민왕이 어둡고 포악스럽다고 원나라에서 장차 폐위시키고 새로 다른 임금을 세우려고 하자, 조칙(謂勃)을 받들 수 없다고 다투다가 드디어 검남(劒南)으로 유배 (流配)되었습니다. 3년 만에 비로소 돌아오게 되자 중국에서 목면(木綿)을 몰래 가져와 사람들에게 직조(織造)를 가르쳤으니,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사실이 이와 같았습니다."라면서 고려사 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바뀌게 된다.
공민왕을 배반하고 덕흥군에 붙었던 내용이 공민왕에 충성을 바치다가 강남에 유배당하는 것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와 함께 목화도 몰래 들여오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 사전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다가 대신들의 상소를 받아 파면 당하는 내용도 없어지고 만다. 이처럼 문익점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오면서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문익점으로 인해 백성들의 의류 생활이 보다 윤택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고 그의 크나큰 공헌이다. 그에게 높이 평가할 것은 중국을 왕래하는 많은 다른 사람들도 수없이 보았을 목화를 보고 고국에서도 재배할 것을 생각해낸 탐구정신이며, 귀국을 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도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재배를 해서 성공한 과학적 사고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객관적인 공로를 주관적인 정치 논리에도 개입시켜 정치행적마저 바꾸어 버리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후손들이 문익점이 목화씨 도입으로 인한 공로외에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조상을 만들려고 했을까? 어쨌든 역사가 후세에 의해 자의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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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30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5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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