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릿말
2. 재일조선인사회의 형성
3. 식민지 시대 재일조선인의 성격
4.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
5. 맺음말
2. 재일조선인사회의 형성
3. 식민지 시대 재일조선인의 성격
4.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
5. 맺음말
본문내용
조선총독부는 출학과 무기정학조치를 내렸는데, 이에 대해 학생과 학부형이 반발하여 물리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폭동화의 양상까지 띄었다.
) 『동아일보』, 1927년 7월 9일자.
이러한 식민지 조선에서 행해진 식민통치에 대해 재일조선인은 재일노총 산하 노동조합 단위로 폭로연설회를 열거나 국내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격문을 발표하는 방식에서 시작되어 '총독정치탄핵동맹회'의 결성에까지 이르렀다. 이 동맹회는 일본 전역의 재일조선인 단체가 소속되어 반제운동의 지속성과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 『동아일보』, 1927년 9월 24일자.
또한 일본 전역에서 총동정치폭압반대투쟁주간을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은 국내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의 원인을 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찾고, 노동운동의 지원을 민족운동의 부분으로서 인식했다. 따라서 경성고무여자직공동맹파업, 원산총파업 등이 일어날 때 마다 노동쟁의에 필요한 소요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으로 부터 모은 기금을 전달하고, 일본 노동단체의 지원을 요청하며, 격려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내 문제로는 식민지해방운동,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私刑 및 탄압반대운동, 기타 노동운동 주도 등을 들 수 있다.
식민지해방운동은 일본의 사회운동단체가 전개하는 각종 대회에 나아가서 '식민지 철폐'를 인식시키고 공론화하는 활동이다. 재일조선인들은 메이데이나 3악법(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 노동조합법안, 소작쟁의조정법안)반대투쟁 등 일본의 각 대중운동에 참가하여 이들의 호응을 끌어내고, 의회투쟁으로까지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재일조선인의 노력에 의해 1924년부터 일본노동단체의 각종 행사에는 '군국주의 반대' '식민지 해방' 등이 공식적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 大原社會問題硏究所, 『日本勞動年鑑』1925년판, 203 - 204면 ; 『日本勞動年鑑』1926년판, 205면.
이러한 활동은 명목상으로는 한일연대라는 입장을 표방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인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 성과를 나타냈다.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私刑 및 탄압반대운동은 關東지진을 비롯하여 일본내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행사와 아울러 新潟懸 노동자학살사건, 小樽高商사건
) 岩村登志夫, 『在日朝鮮人と日本勞動者階級』, 校倉書房, 1972년, 123 - 124면.
, 三重縣학살사건 등에 대해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규탄운동을 전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관동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행사는 매년마다 개최되었다.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은 '재일노총'의 주도와 지원 아래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재일조선인은 노동운동을 경제투쟁으로 인식하지 않고, 일본권력과 결탁한 자본가를 일본제국주의와 동일시 했다. 따라서 노동쟁의에 내거는 구호나 조건에는 '식민지 해방', '차별철폐'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일본내의 문제를 대상으로 한 활동은 일본 사회운동세력의 지원이나 협조속에서 이루어졌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사회운동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민족해방에 기여함과 동시에 일본사회운동에 일익을 담당하는 이중적 효과를 낳았다.
1930년에 국제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여러 재일조선인단체가 해산하게 되자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전 시기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재일조선인만의 독자적인 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는데, 많은 조선인이 가입을 포기함에 따라 민족운동은 개인적으로, 분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파쇼체제로 들어선 일본내에서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권력에 협력하는 동화단체가 아니면 단체를 유지하는 것 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민족운동의 형태는 테러에 의지하거나 비밀써클을 조직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정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적인 분위기와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해방을 맞기 직전까지 각급 학교와 사업장에서 계속되었다.
) 內務省 警報局, 『社會運動の狀況』 각 해당연도 참조.
5. 맺음말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초기의 유학생 중심의 운동에서 점차 모든 계층을 망라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재일조선인들은 국내보다 나은 노동조건과 학업을 위해 도일을 한 후 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모순을 절감하고 이의 철폐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했다. 재일조선인의 운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 투쟁적으로 이끈 중심세력은 사회주의를 견지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가 갖는 이론적인 측면에 동감했다기 보다는 식민지해방에 적합한 사조로 판단하고 수용, 보급했다. 이러한 운동의 주도세력이 갖는 지향성과 노동자 대중의 실천력이 일치함으로써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일본의 사회운동세력이 탄압시기를 맞아 힘을 잃고 운동전선에서 물러난 시기에도 끊임없이 전개될 수 있었다. 또한 재일한인노동단체를 결성 주도한 지도부는 사상단체에서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운동 역시 사상단체와 연대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지속성, 강인성, 투쟁력을 갖춘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식민지 시대에 재일조선인들이 견지한 이념, 계급, 궁극적인 지향성의 차이 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우선 과제로 삼고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 운동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또한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식민지의 본국이자 대표적인 파쇼국의 하나인 일본 땅 한 복판에서 엄중한 감시와 탄압속에서 전개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연구의 부진과 인식 부족으로 인해 일본지역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에 대한 국내학계의 평가는 미비한 편이다. 이는 자료적인 한계나 연구자의 역량에도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본지역 민족운동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일본지역의 조선인은 노동자로서,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해 노력했던 존재로서만 파악한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관내나 만주, 노령에서의 조선인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괄목할만한 연구성과가 제출되고 있다. 만주, 중국관내나 노령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지역의 민족운동도 역시 우리의 역사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 『동아일보』, 1927년 7월 9일자.
이러한 식민지 조선에서 행해진 식민통치에 대해 재일조선인은 재일노총 산하 노동조합 단위로 폭로연설회를 열거나 국내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격문을 발표하는 방식에서 시작되어 '총독정치탄핵동맹회'의 결성에까지 이르렀다. 이 동맹회는 일본 전역의 재일조선인 단체가 소속되어 반제운동의 지속성과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 『동아일보』, 1927년 9월 24일자.
또한 일본 전역에서 총동정치폭압반대투쟁주간을 설정하고 집중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은 국내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의 원인을 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찾고, 노동운동의 지원을 민족운동의 부분으로서 인식했다. 따라서 경성고무여자직공동맹파업, 원산총파업 등이 일어날 때 마다 노동쟁의에 필요한 소요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으로 부터 모은 기금을 전달하고, 일본 노동단체의 지원을 요청하며, 격려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내 문제로는 식민지해방운동,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私刑 및 탄압반대운동, 기타 노동운동 주도 등을 들 수 있다.
식민지해방운동은 일본의 사회운동단체가 전개하는 각종 대회에 나아가서 '식민지 철폐'를 인식시키고 공론화하는 활동이다. 재일조선인들은 메이데이나 3악법(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 노동조합법안, 소작쟁의조정법안)반대투쟁 등 일본의 각 대중운동에 참가하여 이들의 호응을 끌어내고, 의회투쟁으로까지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재일조선인의 노력에 의해 1924년부터 일본노동단체의 각종 행사에는 '군국주의 반대' '식민지 해방' 등이 공식적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 大原社會問題硏究所, 『日本勞動年鑑』1925년판, 203 - 204면 ; 『日本勞動年鑑』1926년판, 205면.
이러한 활동은 명목상으로는 한일연대라는 입장을 표방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인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 성과를 나타냈다.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私刑 및 탄압반대운동은 關東지진을 비롯하여 일본내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행사와 아울러 新潟懸 노동자학살사건, 小樽高商사건
) 岩村登志夫, 『在日朝鮮人と日本勞動者階級』, 校倉書房, 1972년, 123 - 124면.
, 三重縣학살사건 등에 대해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규탄운동을 전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관동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행사는 매년마다 개최되었다.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은 '재일노총'의 주도와 지원 아래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재일조선인은 노동운동을 경제투쟁으로 인식하지 않고, 일본권력과 결탁한 자본가를 일본제국주의와 동일시 했다. 따라서 노동쟁의에 내거는 구호나 조건에는 '식민지 해방', '차별철폐'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일본내의 문제를 대상으로 한 활동은 일본 사회운동세력의 지원이나 협조속에서 이루어졌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사회운동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민족해방에 기여함과 동시에 일본사회운동에 일익을 담당하는 이중적 효과를 낳았다.
1930년에 국제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여러 재일조선인단체가 해산하게 되자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전 시기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재일조선인만의 독자적인 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는데, 많은 조선인이 가입을 포기함에 따라 민족운동은 개인적으로, 분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파쇼체제로 들어선 일본내에서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권력에 협력하는 동화단체가 아니면 단체를 유지하는 것 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민족운동의 형태는 테러에 의지하거나 비밀써클을 조직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정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적인 분위기와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해방을 맞기 직전까지 각급 학교와 사업장에서 계속되었다.
) 內務省 警報局, 『社會運動の狀況』 각 해당연도 참조.
5. 맺음말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초기의 유학생 중심의 운동에서 점차 모든 계층을 망라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재일조선인들은 국내보다 나은 노동조건과 학업을 위해 도일을 한 후 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모순을 절감하고 이의 철폐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했다. 재일조선인의 운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 투쟁적으로 이끈 중심세력은 사회주의를 견지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가 갖는 이론적인 측면에 동감했다기 보다는 식민지해방에 적합한 사조로 판단하고 수용, 보급했다. 이러한 운동의 주도세력이 갖는 지향성과 노동자 대중의 실천력이 일치함으로써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일본의 사회운동세력이 탄압시기를 맞아 힘을 잃고 운동전선에서 물러난 시기에도 끊임없이 전개될 수 있었다. 또한 재일한인노동단체를 결성 주도한 지도부는 사상단체에서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운동 역시 사상단체와 연대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지속성, 강인성, 투쟁력을 갖춘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식민지 시대에 재일조선인들이 견지한 이념, 계급, 궁극적인 지향성의 차이 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우선 과제로 삼고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 운동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또한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식민지의 본국이자 대표적인 파쇼국의 하나인 일본 땅 한 복판에서 엄중한 감시와 탄압속에서 전개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연구의 부진과 인식 부족으로 인해 일본지역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에 대한 국내학계의 평가는 미비한 편이다. 이는 자료적인 한계나 연구자의 역량에도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본지역 민족운동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일본지역의 조선인은 노동자로서, 경제적인 이익만을 위해 노력했던 존재로서만 파악한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중국관내나 만주, 노령에서의 조선인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괄목할만한 연구성과가 제출되고 있다. 만주, 중국관내나 노령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지역의 민족운동도 역시 우리의 역사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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