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에 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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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하지만 고구려인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 후손에게로 이어졌던 것이다. 강제로 사막으로 끌려가고 다시 당의 변방을 지키는 병력원으로 이용되던 고구려인들 중 두각을 나타낸 고선지일가. 고선지는 몇 차례의 대원정을 성공하자 747년 드디어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안서대도호부의 안서절도사에까지 오른다. 포로의 아들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의 세 길을 모두 장악한 실크로드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탈라스 전투.
서기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제국의 30만 호라산군대와 중국의 고선지군이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카자흐스탄공화국 탈라스평원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세계전사에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대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탈라스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5일간의 전투, 그러나 고선지는 예하 돌궐족의 반란으로 처음으로 패배했다.오늘날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서역이 이슬람권으로 굳어진 것이 바로 이때의 고선지의 패배로 인한 것이다. 고선지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당시의 중앙아시아지역으로 한번도 진출해 보지 못했다.그러나 탈라스전투의 여파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크게 일어났다. 이때에 중국의 제지술이 최초로 서방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고선지의 부하 중 제지술의 장인이 아랍 연합군에게 잡혔고, 실크로드의 도시 사마르칸트에 그해 제지 공장이 세워졌다.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로 제지술은 전파되고 아랍은 제지술을 유럽으로 전파한다. 독일과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14세기이다. 제지술 전파는 곧이어 르네상스의 믿거름이 된다. 유럽이 중세암흑기를 벗고 문예부흥기로 들어간 르네상스의 시작시점은 바로 14후반으로 ! 세계사는 말하고 있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글을 쓰고 있던 서방은 비로소 종이 문명을 접하게 된 것이다. 고선지의 패배는 아랍과 서양의 학문을 일으키고 오늘날의 서양 종이 문명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된 문명사의 대전기였다. 세계문명사를 뒤흔든 종이전파의 시작이 바로 고선지의 탈라스전투인 것이다.
서양의 학계는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로 더 유명한 알프스 원정의 나폴레옹보다 떠 뛰어난 전략가로 고선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사람들의 평가는 냉혹하다. "고선지가 우리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잔인하고 탐욕스런 장수였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면에 더 중점을 둬서 고선지에 대해 평가를 내려야 할까? 음............. 우선은 보류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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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3.11.30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5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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