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회의 이해 - 왕실의 혼인 풍습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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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고려 왕실 족내혼의 준비시기 : 태조, 혜종, 정종의 시기
1) 태조의 혼인
2) 혜종의 혼인
3) 정종의 혼인

Ⅲ. 고려 왕실 족내혼의 고착화 시기 : 광종, 경종, 성종, 목종의 시기
1) 광종의 혼인
2) 경종의 혼인
3) 성종의 혼인
4) 목종의 혼인

Ⅳ. 고려 왕실 족내혼의 쇠퇴기 : 현종, 덕종 이후 예종까지의 시기
1) 현종의 혼인
2) 덕종 ~ 예종의 혼인

Ⅴ. 고려 왕실 족내혼의 소멸기 : 의종 이후시기
1) 의종의 혼인
2) 족내혼의 소멸 과정

Ⅵ. 맺음말

본문내용

찰은 심화되어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고 이자겸이 축출된 후에는 다시 고려 왕실의 혼인은 족내혼 체계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Ⅴ. 고려 왕실 족내혼의 소멸기 : 의종 이후시기
의종에 이르러 족내혼은 다시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과 결부되어 강화되지만 결국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1) 의종의 혼인
의종에서는 2명의 후비가 있었다.
莊敬王后 金氏는 宗室 江陵公 溫의 딸이다.
莊宣王后 崔氏는 參知政事 端의 딸이다.
『高麗史』88 后妃 1
의종은 제 1비를 종실 내에서, 제 2비는 귀족가문에서 맞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외형상으로만 보았을 때 족내혼과 족외혼을 행해졌던 바로 이전의 시기와 달라진 점이 없다. 하지만 이자겸의 난이라는 큰 왕실의 위기를 겪은 인종이 이러한 위기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족내혼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는 면에서 이전 시기와 차이점을 보인다. 그리고 이 이후에는 의종이 무신정권으로 인해 폐위되고 나서도 종실녀의 장자가 왕위를 계속 잇게 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전 시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족내혼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신정권기에 무신 상호간에 세력견제가 심하여 그 누구도 독보적인 세력을 갖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는 데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무신 정권기에는 왕실과 이미 혼인관계를 맺은 후에 정적들의 저항에 부딪혀 정계에서 실각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일도 일어났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왕실은 다시 족내혼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지만 이는 최씨 정권이 그들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왕실과 혼인을 이루기까지 걸린 시간동안 가능한 것이었고 최씨 집권이후에는 이들과 왕실의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다.
2) 족내혼의 소멸 과정
고려 광종에서 비롯된 왕실 족내혼은 목종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지다 현종이 즉위하게 되면서 점차 그 비중이 감소되어 갔다. 현종 이후에는 족내혼과 동시에 귀족가문에서 다른 후비들을 맞아들여 왕자와 공주를 출산하였는데 이 무렵이 되면 족내혼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사료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사례는 선종 3년에 문종의 왕자인 김官侯 烝에 의해 나타난다.
김관후 烝은 ……학술이 있었다. 일찍이 扶餘公 燧가 일찍이 積慶宮主에게 장가들려 하자 烝과 과 愉등이 同姓에게 장가드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간하였으나 왕이 따 르지않았다.
『高麗史』 90 列傳3 宗室 1 文宗子
문종의 왕자인 부여공 수가 문종의 공주인 적경공주에게 장가드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라고 간하였다고 하는데 반대의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김관후는 학술이 있었다는 사료로 보건대 유학적 동성불혼 사상에 영향받고 왕실 근친혼에 반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혼인은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도 왕실 족내혼은 계속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동성 근친혼에 대한 법적 제재조치가 문종때 마련되어 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귀족층 정도에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왕실에서는 계속 시행되어져왔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귀족 가문에 의한 족외혼이 활발해지기도 하였고 특히 무신집권기에 최씨 정권이 안정되자 이들과의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원의 간섭기에 들자 원은 고려의 족내혼을 강하게 비난하였고 충선왕때 이르러서는 왕실 동성혼을 금하게 된다. 결국 공민왕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던 신진 사대부는 고려의 족내혼을 크게 비판하였고 동성혼의 철폐를 실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함으로서 족내혼은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Ⅵ. 맺음말
태조는 즉위 이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29명의 후비와 혼인하였는데 시기에 따라 그 혼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태조는 혼인을 통하여 통일국가를 이루는 국가적 과제를 혈연적 관계를 통해 완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인은 점점 태조 다음의 세대에 와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에서 후비를 맞아들여 점점 그 대상을 줄여나가고, 광종이 이복 누이동생인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족내혼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광종 이후 목종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목종이 정변으로 축출되고 현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왕실내 족내혼에 변화가 생겼다. 제 1비는 왕족에서 받아들였지만 그 이외에는 귀족 가문에서 받아들였고 여기서 태어난 왕자가 다음의 왕위를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종 이후 인종에 이르기까지 왕실 족내혼은 사실상 그 의미를 잃어가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의종 대에 와서야 족내혼이 잠시 강화되어 무신집권기까지 연속되지만 그 성격은 이전의 족내혼과는 다르게 평가된다. 이러한 고려 왕실의 족내혼은 선종 대부터 그 비판이 제기되어 왔고 원 간섭기에 이르러서는 원의 동성혼 반대 압력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원의 간섭기로부터 벗어난 뒤에도 정국의 어지러움과 고려의 멸망으로 결국 왕실 족내혼은 영영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 왕실의 족내혼은 고려에 와서 생성 발전된 제도가 아니고 신라 때부터 존재하였던 혼인 유형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족내혼은 조선시기에 이르러서 이에 대한 법적인 제재뿐만 아니라 경제적 제재까지 가하여 그 철폐를 위한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고려 왕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족내혼이라는 특징은 고려가 한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즉 고대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족내혼의 양상의 변화에 따라 당시 고려 정국의 변화의 추세도 함께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비록 족내혼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통해서 고려 사회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살펴본 것이지만,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는 생각으로 작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고려 사회의 전체적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시작이 되었음하며, 앞으로도 각 주제들을 중심으로 고려 사회의 전체적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빈다.
■ 참고 문헌 ■
- 1991, 조선통사 (상), 사회과학출판사
- 민병하 外, 1993, 한국사 18 - 고려무신정권, 국사편찬위원회
- 1994, 한국사 5, 한길사
- 1995, 한국역사입문 2 (중세편), 풀빛
- 김당택, 1999, 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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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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