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역관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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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릿말

Ⅱ. 역관과 역학
1. 역관
2. 역학

Ⅲ. 고려시대의 역관
1. 통문관 이전의 역관
2. 통문관 이후의 역관
3. 원 간섭기의 역관

Ⅳ. 역관의 양성
1. 역관양성기구
2. 교과목
3. 수업연한
4. 교수관과 생도
5. 입학 연령과 역학생 수

Ⅴ. 맺음말

본문내용

만 고려시대의 譯學敎育을 위한 교과목에 관한 자료는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초의 교과목이나 『老乞大』『朴通事』가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보면, 그 당시에도 여러 교과목이 사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송춘영, 1988, 위의 책, pp.162~166
3. 수업연한
譯學의 수업연한은 譯語의 종류나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것은 아래의 사료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3년 내에 한어와 몽고어에 능통하지 못한 자는 斥遺充軍한도록 한 것
『太祖實錄』 卷5 태조 3년 11월 을묘조
에서 한어와 몽고어 등의 학습에 3년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향교나 四學에서 四書를 학습하는 데는 대학 1개월, 중용 3개월, 논어와 맹자 각 4개월로 모두 12개월이 소요되는데 한어교육의 경우 『老乞大』, 『朴通事』, 『소학』, 『효경』등을 학습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을 합치면 적어도 3년 정도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송춘영, 1988, 앞의 책, p.167
1.1.1.1.1.1.13.閉戶三年 晝夜不小懈 遂知名得
『高麗史』 卷105 열전18 조인규전
4. 敎授官과 生徒
고려는 국초부터 유학교육 뿐만 아니라 잡학교육을 위하여 京外에 교수관을 설치하였으나 譯學敎育을 위한 교수관의 설치에 관한 기록은 고려전기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려전기의 譯學이 집권체제의 확립과정에서 雜學으로서의 독립한 학문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제도적으로 미비하였고, 譯學의 학문적 위치가 다른 雜學에 비하여 그 중요성이 낮아서 천시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선호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신집권 이후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와 민생의 피폐 등으로 교육이 부진하였던 당시에 있어서 譯學敎育을 위한 유능한 자질을 갖춘 교수관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종 5년(1202)에 禮賓省에서 譯語를 시취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송춘영, 1988, 앞의 책, p.168
하지만 원 간섭기에 이르러 譯官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등장하면서 譯學敎育에 활기를 뛰게 된다. 이것은 譯語都監과 通文官의 설치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평양, 의주, 황주, 함흥, 부산포, 제초 등지에 역학 교수관이나 훈도 등을 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대외 통교의 요로에는 譯學院이나 譯學堂을 설치하고 역학 교수관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역학 교수관은 제 관서의 이속이나 잡류와는 달리 품관 祿官으로서 단순한 통사적 직능을 지닌 舌人에 비하여 우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춘영, 1988, 위의 책, pp.168~169
5. 입학 연령과 譯學生 수
譯學院에 입학한 연령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겠으나 성종조에는 遼에 동자 10여 명을 뽑아 보내어 거란어를 학습해 오도록 하였으며, 『高麗史』열전 元卿傳에 卿이 어려서 몽한어를 배우고
『高麗史』卷124 열전37 元卿傳
, 鄭雲敬이 나이 10세에 영주 향교에 입학
『三峰集』卷4 行狀
한 것을 보면 譯學 생도의 입학연령은 10세 전후로 나이가 많을 경우는 15, 16세에서 20여 세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譯學生 수는 譯學의 대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4개의 譯學 중에서도 漢語가 가장 중요시된 것을 보면 漢學生 수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譯學生 수를 감안하면 중앙의 司譯院에는 漢語 학생이 10~20명, 몽고어 학생과 여진어 학생 및 왜어 학생이 5~10명, 외방의 譯學院이나 譯學堂에도 역어별로 5~10명 정도 두었을 것이다.
송춘영, 1988, 앞의 책, pp.172~174
하지만 원 간섭기에는 몽고어의 활용도가 높았음으로 이 수치보다는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Ⅴ. 맺음말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주변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따라서 譯官의 사회적 역할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 譯官은 어떠한 위치에 있었을까? 어느 시기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많았던 고려의 譯官을 통해서 역관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였지만 사료의 부족과 고려시대의 譯官에 관한 연구가 그리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궁금증은 더욱 많이 남은 것 같다. 조선시대에서 비슷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고려시대만의 고유한 譯官의 특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런 것을 모두 다 살펴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 고려시대는 禮賓省에서 譯語都監, 通文官, 司譯院에 이르기까지 譯官을 양성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의 외국어를 배우는 학생처럼 고려시대의 譯官 역시 외국으로 유학을 가거나 외국의 역어 교수관을 초빙하여 학습하였다. 비록 고려시대를 전반적으로 보면 譯官의 사회적 지위나 대우를 살펴보면 그들은 자신의 역할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원 간섭기라는 국가적으로는 위기의 순간이지만 당시의 사회적 필요성에 그들은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譯官은 앞서 말한 여러 기구나 여러 방법을 통하여 譯官이 되었던 것이다. 비록 초기에는 譯官의 관직 진출이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고 그 중요성도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원 간섭기 이후에는 신분 상승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중인계층에 속하는 譯官은 원 간섭기에 이르러 주목을 받았지만, 譯科를 통한 譯官의 신분상승은 고려후기의 신분 질서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譯官의 존재는 그 사회에 있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譯官을 알아보기 위해서 사료가 부족하여 그 세세한 내용들은 알 수 없었지만, 우리의 역사상에서 대외관계를 위한 譯官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원 간섭기에 나타난 譯官의 사회적 위상은 중인들의 신분 상승과 관련하여 발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김수진, 1981,『高麗譯官考 : 麗元關係를 中心으로』, 東亞大學校 大學院
송춘영, 1988, 「高麗時代의 譯學敎育」『대구사학』35, 大丘史學會
송춘영, 1998, 『고려시대잡학교육연구』, 螢雪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1, 『高麗-朝鮮前期 中人硏究』, 신서원
김인호, 2001,『(우리가 정말 몰랐던) 고려이야기』,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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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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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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