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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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출생 및 청년시기

(2) 정한론

(3) 정치가로서 입신

(4) 한국침략

(5) 이토의 죽음

(6)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했다.
"이 조약을 승인하거나 거부하거나는 자유지만, 만약 거부하면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쁜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병탐에 점진주의자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고종황제와의 일은 그렇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뿐만 아니라 광업권 등 경제적인 수탈을 의미했으며 그 선봉장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후 그는 초대 통감 겸 한국주둔 육군 통수권자로 1905년 12월에 부임했다.
이토가 부임한 후 악명 높은 경찰제도가 확립되었다. 또한 그는 궁정제도를 개편했다. 개편 목적은 경제지배의 확립과 일본측 권력에 이한 치안유지에 있었다. 특히 치안유지에 대해서는 고문제도를 통해 경찰권을 확보했다. 그 배후에 강력한 주둔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궁정을 중심으로 중앙과 지방에 일본의 경찰망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깔리게 된 것이다. 13도의 도청 소재지에 경찰 고문지부를 두고. 전국에 26개의 분견소와 122개의 분파소를 두고 일본인 경찰관을 두었다. 일본인 경찰관은 직접 통감의 지시하에 움직였다. 당시 일본인 경찰관은 경시 21명, 경부 52명, 순사 605명이었다. 이 수는 1907년 10월 경무 고문제도 폐지에 의한 한일경찰 합동일 때는 보좌관경시 21명, 보좌관보 78명, 보조원 1,205명으로 특히 한국인 등의 하부조직이 확대되었다.
(5) 이토의 죽음
1909년 6월 이토는 통감을 사임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만주 사찰의 길을 떠났다. 이 여행은 하얼빈에서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크초프와 만나 한국문제를 중심으로 극동에서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0얼 14일 한밤중에 도쿄 남쪽 해안가의 오이소에 있는 집을 출발한 이토는 14년 전에 청나라의 이홍장과 청일조약을 맺었던 시모노세키의 춘범루에서 일박 한 후 중국의 대련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러일전쟁 때의 격전지 여순203고지를 방문한다. 다시 여순을 출발해 장춘을 경유하고 10월26일 아침 9시 조금 넘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코크초프와 함께 러시아 수비대가 열병하고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환영나온 일본인들에게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러시아 수비대 뒤쪽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권총을 맞고 쓰러졌다. 쓰러진 이토는 열차 안으로 실려 들어갔다. 빈사상태에서 이토는 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수행인이 "한국인입니다. 체포되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바보 같은 놈" 하고 눈을 감았다. 이때의 그의 나이 69세였다.
사건 공판은 일본측에 의해 행해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왜 살해했는가" 라는 질문에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가로막는 인물이기 때문" 이라고 대답하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러일전쟁 때 일본왕은 선전포고문에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라고 해 당시 한국인은 감동했다. 그리하여 전쟁중에 이 말을 믿고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위해 일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군이 개선했을 때는 한국이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다. 이제 곧 한국의 독립ㅇ 확실하리라고 다들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이 된 후 제 2차 한일협약 그리고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이 설정되었고 이전보다 일본의 간섭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선전포고문의 책임자인 일본왕의 말과는 다르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모든 한국민은 역적 이토 히로부미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은 한국의 독립 달성을 위해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고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죽였다."
(6)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한 평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이토의 죽음에 대해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당시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당시 문학가이며 교육가인 이노우에 데츠지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후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썼다.
".......... 1909년 9월 초순경, 가츠라 수상 집에서 연회가 있었을 때 이토공이 갑자기 졸도했다. 위독하다는 소문도 나돌았으나 곧이어 회복이 됐다. 앞으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내심 생각했다. 공은 이미 69세라는 고령이어서 앞으로 길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던 중, 하얼빈 역에서 우연스럽게도 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그와 같은 화려한 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자택 다다미방에서 죽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장소는 하얼빈이다. 그 상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초대 한국 통감을 했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깊은 의의가 있다. 이때는 공으로서는 스스로 업무를 일단락 시켰을 때다. 그리하여 한국경영에 대해 일단락을 봤으므로, 이 해 6월에 통감을 사임하게 된다. 이제 공으로서는 한가한 시기로 돌아가던 찰나 한국인을 상대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대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경영을 위해서 공이 희생된 것이 명료해진 것이다. 피를 가지고 생전의 결점을 씻어버리게 되었고, 세계만민의 동정을 공은 최후에 얻은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에게 침략자로서 '악' 그 자체이고 이토는 '악' 의 상징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이토를 사살한 의사 안중근의 반대편에 이토를 세워놓았을 때 이러한 이미지는 매우 명쾌하게 부각된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지만 일본에서의 이토의 평가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양국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토대를 쌓은 민족의 위인이며 네 차례에 걸친 내각의 수반으로서,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천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본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지폐에 나올 정도로 존경받는 이유는 그가 실무가형 정치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극히 당리당파를 초월해 중립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태도로 임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 나라에서는 36년간 암울한 식민지 지배를 가능케 한 주요 인물로 기억이 되고 있지만 그의 멀리 내다보는 혜안과 실리 추구의 정치 자세는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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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17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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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8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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