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들어가며
2.악의 존재로 인한 신 존재의 비판, 그리고 종교철학적 변신론 (신정론)
3.형이상학적 고찰 - 라이프니츠의 신정론
4.변신론에 대한 칸트의 비판
5.칸트에 있어서의 자유와 악
6.칸트에 있어서의 악과 책임
7.맺으며
2.악의 존재로 인한 신 존재의 비판, 그리고 종교철학적 변신론 (신정론)
3.형이상학적 고찰 - 라이프니츠의 신정론
4.변신론에 대한 칸트의 비판
5.칸트에 있어서의 자유와 악
6.칸트에 있어서의 악과 책임
7.맺으며
본문내용
아 곧 파산했으며 유대인은 지방정부와 법원, 대학에서 쫓겨났다. 1933 1938년에 이루어진 일련의 법령 몰수 대학살로 히틀러는 독일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 수백만을 학살한다.
나치 독트린에 따르면 그 가운데는 유대인 혈통을 가진 수천 명의 독일 그리스도교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5년 뉘름베른크 법에 따라 유대인은 시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다른 독일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탈나흐트(1938. 11. 9 10) 대학살 결과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교 예배당과 유대인 기관이 사실상 파괴되었다. 그 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고 독일 유대인의 재산 대부분은 가혹한 벌금과 기타 강제징수로 몰수되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으며 실제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 토지를 가질 수도 없었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는 사귈 수 없었으며 공원이나 도서관, 박물관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안에서만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 12세가 넘는 유대인 남자는 군수공장에 징집되었으며, 전화와 모든 공공 수송시설의 사용을 금지당했다.
6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아리 씌여진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했다. 여러 선전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는 반유대주의가 모든 유럽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용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38년 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종족법을 본보기로 반유대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38년 오스트리아,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 합병해 이들 나라의 유대인을 종속시켰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도 1938년 히틀러의 법을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반유대주의 법령을 제정했다.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는 1937년 12월 옥타비안 고가가 총리가 되어 일련의 나치 반유대주의 법률을 지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제 2차 세계대전초 독일군이 연승을 거두자, 유럽에 거주하는 대다수 유대인은 나치와 그 위성국 치하에 들어갔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교외의 그로센반제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15명의 나치 주요관료가 모여 나치 친위대 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취해진 결정은 모든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동부에 있는 수용소로 이주시켜 그들을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일부는 철저하게 학살될 것이며(그러나 학살이나 처형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 그밖의 유대인은 거대한 노동부대로 편성될 것이지만, 소모적인 노동과 빈약한 식사로 그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단학살수용소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대량학살 방법은 특별히 만든 가스실에서 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는 인근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400만여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트레블링카,헤움노,소비보르,벨제크 등의 집단 학살수용소에서 죽었다. 전쟁 기간에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총 57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특히 나치의 잔학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희생된 사람, 반유대인, 유대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요나스의 변신론
요나스에게 있어 아우슈비츠 참사는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신의 도덕적 지혜에 반립하는 세계내 반목적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적 정의와 호의에 대한 결정적인 세계내 반증사례들은 아우슈비츠라는 전대미문의 도덕적 악 자체와 이로 말미암은 유태인의 고난이다. 이를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 역사적 측면
전통적으로 유태인들의 고난에 대한 유태교의 신정론적 해명은 대개 응보설과 순교설로 나뉜다. 전자는 유태인의 고난은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선민인) 유태인이 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며, 후자는 유태민족의 고난은 바로 유태 민족의 의인됨의 증거인 동시에 메시아를 통한 임박한 승리의 증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대답은 아우슈비츠 참사에 직면하여 신정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요나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무고한 숱한 어린이들의 죽음은 불신앙이나 부정의 때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앙을 위해서 죽은 것도, 옳음을 위하여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이 과정에서 신으로부터의 그 어떤 구원의 손길도 없었기 때문이다. 참사 내내 신은 침묵했다. 그래서 요나스는 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단언한다.
- 논리적 측면
논리적으로 전능이라는 개념은 '자기 지양적이고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이 요나스의 주장이다. 전능, 즉 절대적인 권능은 한계가 없는 권능일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외부에 타자를 두지 않는 권능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외부의 그 어떤 권능도 부정하는 권능, 즉 대상 없는 권능은, 마치 저항 없는 힘이 그 어떤 현실적 힘도 아닌 것처럼, 공허하다. 대상 없는 권능은 권능 없는 권능이며 전부는 무와 같다. 만일 전능한 권능이 현실적인 권능이려면 자기자신외에 대상을 가져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이 권능은 더 이상 전능하지 않다. 요컨대 힘의 개념은 원래 관계 개념이어서 작용자와 피작용자를 전제하는데 전능은 이러한 힘의 개념의 필연적 전제인 피작용자를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전능한 신이 불가능한 이상 논리적으로 신정론은 불가능하다.
- 종교철학적 측면
악의 현존에 직면해서 신의 이해가능성(선 악의 기준은 신과 인간에서 동일하다는 것), 신의 전능, 신의 선함 이상의 삼자를 동시에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신이 일정정도, 일정 방식으로 이해 가능하여야 한다면 신의 선함은 악의 실존과 통일 가능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는 신이 전능하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신이 우리와 같은 기준에 입각하여 선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악이 있는 것은 신이 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치 독트린에 따르면 그 가운데는 유대인 혈통을 가진 수천 명의 독일 그리스도교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5년 뉘름베른크 법에 따라 유대인은 시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다른 독일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탈나흐트(1938. 11. 9 10) 대학살 결과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교 예배당과 유대인 기관이 사실상 파괴되었다. 그 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고 독일 유대인의 재산 대부분은 가혹한 벌금과 기타 강제징수로 몰수되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으며 실제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 토지를 가질 수도 없었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는 사귈 수 없었으며 공원이나 도서관, 박물관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안에서만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 12세가 넘는 유대인 남자는 군수공장에 징집되었으며, 전화와 모든 공공 수송시설의 사용을 금지당했다.
6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아리 씌여진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했다. 여러 선전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는 반유대주의가 모든 유럽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용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38년 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종족법을 본보기로 반유대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38년 오스트리아,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 합병해 이들 나라의 유대인을 종속시켰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도 1938년 히틀러의 법을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반유대주의 법령을 제정했다.
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는 1937년 12월 옥타비안 고가가 총리가 되어 일련의 나치 반유대주의 법률을 지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제 2차 세계대전초 독일군이 연승을 거두자, 유럽에 거주하는 대다수 유대인은 나치와 그 위성국 치하에 들어갔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교외의 그로센반제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15명의 나치 주요관료가 모여 나치 친위대 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취해진 결정은 모든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동부에 있는 수용소로 이주시켜 그들을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일부는 철저하게 학살될 것이며(그러나 학살이나 처형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 그밖의 유대인은 거대한 노동부대로 편성될 것이지만, 소모적인 노동과 빈약한 식사로 그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단학살수용소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대량학살 방법은 특별히 만든 가스실에서 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는 인근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400만여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트레블링카,헤움노,소비보르,벨제크 등의 집단 학살수용소에서 죽었다. 전쟁 기간에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총 57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특히 나치의 잔학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희생된 사람, 반유대인, 유대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요나스의 변신론
요나스에게 있어 아우슈비츠 참사는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신의 도덕적 지혜에 반립하는 세계내 반목적적인 것이다. 그리고 신적 정의와 호의에 대한 결정적인 세계내 반증사례들은 아우슈비츠라는 전대미문의 도덕적 악 자체와 이로 말미암은 유태인의 고난이다. 이를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 역사적 측면
전통적으로 유태인들의 고난에 대한 유태교의 신정론적 해명은 대개 응보설과 순교설로 나뉜다. 전자는 유태인의 고난은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선민인) 유태인이 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며, 후자는 유태민족의 고난은 바로 유태 민족의 의인됨의 증거인 동시에 메시아를 통한 임박한 승리의 증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대답은 아우슈비츠 참사에 직면하여 신정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요나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무고한 숱한 어린이들의 죽음은 불신앙이나 부정의 때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앙을 위해서 죽은 것도, 옳음을 위하여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이 과정에서 신으로부터의 그 어떤 구원의 손길도 없었기 때문이다. 참사 내내 신은 침묵했다. 그래서 요나스는 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개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단언한다.
- 논리적 측면
논리적으로 전능이라는 개념은 '자기 지양적이고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이 요나스의 주장이다. 전능, 즉 절대적인 권능은 한계가 없는 권능일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외부에 타자를 두지 않는 권능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외부의 그 어떤 권능도 부정하는 권능, 즉 대상 없는 권능은, 마치 저항 없는 힘이 그 어떤 현실적 힘도 아닌 것처럼, 공허하다. 대상 없는 권능은 권능 없는 권능이며 전부는 무와 같다. 만일 전능한 권능이 현실적인 권능이려면 자기자신외에 대상을 가져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이 권능은 더 이상 전능하지 않다. 요컨대 힘의 개념은 원래 관계 개념이어서 작용자와 피작용자를 전제하는데 전능은 이러한 힘의 개념의 필연적 전제인 피작용자를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전능한 신이 불가능한 이상 논리적으로 신정론은 불가능하다.
- 종교철학적 측면
악의 현존에 직면해서 신의 이해가능성(선 악의 기준은 신과 인간에서 동일하다는 것), 신의 전능, 신의 선함 이상의 삼자를 동시에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신이 일정정도, 일정 방식으로 이해 가능하여야 한다면 신의 선함은 악의 실존과 통일 가능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는 신이 전능하지 않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신이 우리와 같은 기준에 입각하여 선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악이 있는 것은 신이 전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