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와 서양 오페라, 뮤지컬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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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판소리

2. 오페라

3. 뮤지컬

본문내용

는 서민생활이나 인정미담을 주로 하였고, 그 취재나 형식을 확립한 것은 페르골레지였다. 모차르트의 "여자는 모두 이런 것"과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등이 이에 속한다.
4.오페라 부프 ( Opera bouffe ) 프랑스의 희가극으로, 어원적으로 오페라 부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양자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페레타와 비슷한 가벼운 음악희극으로, 대화의 부분에 대사를 사용한다. 뒤니(Duni)가 창시자이다.
5.오페라 코미크 ( Opera comique ) 희가극의 일종으로, 음악사이에 대화와 독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코미크라 하지만 줄거리가 희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18세기 후반,프랑스에서 생긴 것으로 처음에는 희극적이었지만, 후에는 상관없이 대사가 있는 오페라가 되었다. "카르멘"이나 "마농" 등의 오페라를 오페라 코미크라 부르는 작가들이 있다.
6.오페레타 (Operetta ; 輕歌劇 ) 오페레타를 경가극이라고도 하며, 극적인 진행에 있어서 대사를 동반한다. 여기에 노래와 무용이 들어 가기는 해도, 음악적인 내용은 낮은 편이며 또한 오케스트라도 소규모적이다. 이러한 작품의 예로는 요한시트라우스의 "집시의 남작", "박쥐"등이 유명하며, 밀뢰커의 "거지학생"등이 이에 속한다.
판소리
판소리란, 부채를 든 한 사람의 창자(소리꾼)가 한 사람의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창(소리),아니리(말),너름새(몸짓)를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인 음악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리꾼(倡優:판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가수)가 부르는 서사적인 노래를 한문으로는 잡가(雜歌).본사가.창가.극가 등으로 치고 있으나 본디 우리 말로는 판소리라 일러 왔다. 판소리란 판놀음으로 연행되는 소리라는 뜻이다. 판놀음은 넓은 마당을 놀이판으로 삼고 '판을 벌린다'하여 놀이의 구색을 갖추고, '판을 짠다'하여 놀이 순서를 제대로 짜서 처음부터 끝가지 제대로 연행하는 놀음을 가리키는 바 판놀음으로 타는 줄타기는 판줄이라 하고, 판놀음으로 치는 농악은 판굿 이라 한다. 그렇듯이 판놀음으로 벌이는 소리를 판소리라 하는 것이 니 판소리란 이름이 본디부터 있었던 이름이라 하겠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예술의 특질인 자유분방함과 임의성(任意性),즉흥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예를들면 송흥록代까지는 정확한 대본없이 스승으로부터 익힌 사설에다 구전가요나 재담등을 즉흥적(卽興的)으로 삽입하여 구연(口演)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엄청난 사설의 양으로 보아 사설이나 창법(唱法)의 정확한 전승이 어려웠다기 보다도 청중의 감흥을 중요시한 방법으로서 소리꾼(唱者)의 가변성(可變性)과 즉흥적(卽興的) 윤색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것이 판소리의 특성이자 묘미이다. 판소리는 18 세기초(숙종-영조때 AD 1674-1776)에 발생한 것으로 18 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판소리의 기원은 훨씬 이전,신라의 화랑과 관련되며 그 직접적 계보는 산대잡희의 한 과정이었던 극적 노래의 분화로 보고 있다. 판소리는 그 발생의 바탕이 되는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구전가요,무가, 공연 현장에서의 감흥을 위한 재담등 여러 문화적 요인들이 첨가되어 변화해온 적층적 문화형태라는 형성 과정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19세기 전반기를'전기 8명창시대'라 하고,19세기 후반기를 '후기 8명창시대'라고 한다. 권삼득.황해천.송홍록.방만춘.염계달.모홍갑.김계철.고소관. 신만엽.송광록.주덕기 등의 8명창들은 각기 특색 있는 창법과 선율을 개발하여 양반들의 감상과 미의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으며, 각 지역의 민요 선율을 판소리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 후기 8명창들은 전기 8명창들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다듬어 다양한 더늠(長短)을 창출했다. 이 시기에 박유전에 의해 보다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서편제 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판소리는 더욱 다양하고 강한 흥행성을 띤 예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판소리는 왕실에까지 침투하게 되었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많은 창우들은 벼슬을 받기도 했다. 19세기부터 판소리의 주요청중은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덕분 에 판소리는 사설.음악.무대 등에서 진경을 이루었으나
민중적 현실인식과 반봉건적 예술적 심화나 문제의식 은 일정하게 수정되어 얼마 간은 봉건적 의식의 개입 가지도 허용하는 굴절을 겪었다. 조선 고종 때의 판소 리 작가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 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에 걸 맞는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는데, 이때 판소리 6마당의 사설집과 성 조가.광대가 등의 창작 단가들이 만들어졌다. 20세기는 전기 5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 당시 활동한 명창들은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 김채만.정정렬 등이다. 이때는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 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 내는 사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판 소리의 변화는 무대예술로서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 다. 1902년 기생.광대 등의 단체인 협률사가 만들어지 면서 판소리는 극적 요소가 강한 창극으로 변신했다. 또한 유성기의 출현으로 판소리의 향수방식에도 근본 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광대는 남자들이 하던 것 이었는데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된 후 허금파.강소춘.이화중선.박녹주 등 여창이 다수 등 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판소리의 소리.발림 등이 여성화되기도 했다. 8.15해방 후 판소리는 여성 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 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판소리는 점점 쇠퇴 해 ,1960년대에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정부의 지원으로 1964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시작되었 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소생의 계기를 맞은 판소리는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 와 함께 학자.학생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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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29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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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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