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머리말
2.개혁의 배경
왕건의 호족 융합정책
광종의 즉위
3.광종의 개혁
조심스러운 출발
제도적 개혁
숙청의 시대
4.개혁의 결과
왕권의 강화
제도의 기틀
무자비한 숙청
태양의 제국
5.맺음말
2.개혁의 배경
왕건의 호족 융합정책
광종의 즉위
3.광종의 개혁
조심스러운 출발
제도적 개혁
숙청의 시대
4.개혁의 결과
왕권의 강화
제도의 기틀
무자비한 숙청
태양의 제국
5.맺음말
본문내용
개혁 과정에서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경험이 풍부한 많은 구신, 숙장들이 혼란 속에서 죽임을 당했고, 자신의 형들이었던 동시에 선왕이었던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들을 살해하였다. 게다가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 비재(非才)들과 신진관료층인 후생(後生)들이 함부로 진출하였다. 광종 말년에는 이러한 무자비한 숙청 때문인듯한 참회활동으로 재정의 많은 부분을 불교행사에 지출하였고 그것으로 모자라 백성들에게도 참회를 강요하였다.
4. 태양의 제국
우리 나라 역대 왕조가 대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는 경우가 드문데 광종은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황제국 체제를 따라 황제의 후계자를 태자라고 하고 황제를 폐하, 태자를 전하라고 하였다. 또 수도를 황도라고 하고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황성이라고 하는 등 자주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주와 송의 등장에 바로 그들의 연호를 따랐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자주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주적 목적보다는 호족들에게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진다.
Ⅴ.맺음말
이상으로 광종이 재위기간동안 실시했던 여러 가지 개혁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광종의 개혁은 광종의 즉위에서부터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광종이 그러한 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광종 또한 짧은 재위기간에, 의문의 죽음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종은 앞에서 형들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자신 또한 호족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자신의 목숨과 왕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종은 그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 왕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온 힘을 다 했다. 그것이 정도가 지나쳐 자신을 옹립했던 공신들과 친족까지도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던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이지만 그로 인해서 고려라는 나라가 단명으로 끝나지 않고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빛내며 수성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광종의 제국』 기획자가 말했듯이 광종은 분명 악역이지만 고려의 수성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 현대에도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였다고 해서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꼴이라고들 얘기하며, 미국 대학의 어떠한 한국 교수는 한국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강한 국왕의 사례로 고려 광종을 들었다. 그렇다. 광종의 개혁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후대에 미친 결과로 볼 때 매우 필요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광종은 그러한 개혁을 단행한 훌륭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1. 변태섭/ 한국사통론/삼영사/2002
2.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12(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1993
3. 국사편찬위원회/국사(상)/교육부/2001
4. 전국역사교사모임/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1/휴머니스트/2003
5. 이이화/한국사이야기5(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한길사/2001
6. 김창현/5백년의 리더십 광종의 제국/푸른역사/ 2003
7. 하현강/고려왕조 성립기의 제문제/학위논문(박사)/연세대/1984
8. 이원형/고려 광종대 개혁정치의 참여세력에 관한 연구/학위논문(석사)/연 세대/1988
9. KBS/ 역사스페셜 고려 광종, 제국의 아침을 열다/2002
10. 조선일보/고려 성종-조화와 균형의 리더십/2003.01.08
11. 월드뉴스/"한국에 왕조가 있었습니까?"/200.05.30
12. http://oneness.pe.kr/study/history/광종.htm
13.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역사속의 한국인)
14.문화일보/광종과 노무현(인턴기자의 눈)/2003.01.21
4. 태양의 제국
우리 나라 역대 왕조가 대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는 경우가 드문데 광종은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며 황제국 체제를 따라 황제의 후계자를 태자라고 하고 황제를 폐하, 태자를 전하라고 하였다. 또 수도를 황도라고 하고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황성이라고 하는 등 자주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주와 송의 등장에 바로 그들의 연호를 따랐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자주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주적 목적보다는 호족들에게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여겨진다.
Ⅴ.맺음말
이상으로 광종이 재위기간동안 실시했던 여러 가지 개혁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광종의 개혁은 광종의 즉위에서부터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광종이 그러한 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광종 또한 짧은 재위기간에, 의문의 죽음으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종은 앞에서 형들의 죽음을 지켜보았고 자신 또한 호족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올랐기에 자신의 목숨과 왕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광종은 그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 왕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온 힘을 다 했다. 그것이 정도가 지나쳐 자신을 옹립했던 공신들과 친족까지도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던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이지만 그로 인해서 고려라는 나라가 단명으로 끝나지 않고 500년이라는 긴 역사를 빛내며 수성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광종의 제국』 기획자가 말했듯이 광종은 분명 악역이지만 고려의 수성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 현대에도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였다고 해서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꼴이라고들 얘기하며, 미국 대학의 어떠한 한국 교수는 한국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강한 국왕의 사례로 고려 광종을 들었다. 그렇다. 광종의 개혁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후대에 미친 결과로 볼 때 매우 필요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광종은 그러한 개혁을 단행한 훌륭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1. 변태섭/ 한국사통론/삼영사/2002
2.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12(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1993
3. 국사편찬위원회/국사(상)/교육부/2001
4. 전국역사교사모임/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1/휴머니스트/2003
5. 이이화/한국사이야기5(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한길사/2001
6. 김창현/5백년의 리더십 광종의 제국/푸른역사/ 2003
7. 하현강/고려왕조 성립기의 제문제/학위논문(박사)/연세대/1984
8. 이원형/고려 광종대 개혁정치의 참여세력에 관한 연구/학위논문(석사)/연 세대/1988
9. KBS/ 역사스페셜 고려 광종, 제국의 아침을 열다/2002
10. 조선일보/고려 성종-조화와 균형의 리더십/2003.01.08
11. 월드뉴스/"한국에 왕조가 있었습니까?"/200.05.30
12. http://oneness.pe.kr/study/history/광종.htm
13. http://www.koreandb.net/KoreanKing/html(역사속의 한국인)
14.문화일보/광종과 노무현(인턴기자의 눈)/2003.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