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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의 남정 이후 5세기 중엽까지 고구려를 등에 업고 동래와 양산지역의 가야계 소국을 병합하였고, 동래와 양산의 물금나루·용당나루 등을 교두부로 낙동강을 건너 가락국에 대한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백제는 475년에 웅진에 천도한 이후, 『일본서기』顯宗 3년(487) 是歲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섬진강수계를 따라 동진 또는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6세기 초경에 남원 등의 가야계 소국을 통합하고, 529년까지 滯沙地域(韓多沙 : 하동)으로는 남하를 완료하였으며, 이제 섬진강을 건너 安羅國을 위협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출전- 이영식「가야 각국사의 재구성」『문헌으로 본 가락국사』혜안 2000
. 4세기말 ∼ 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 21번 同一한 記事
가야의 중심 세력이 헤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 5세기 가야지역의 유적상황은 4세기 이전에 비하여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우선 패총 및 대형목곽분 등이 다량 출토되던 김해를 중심한 경남 해안지대에서는 5세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고분유적의 수효가 줄어들고 규모도 소형석곽분 정도로 위축되었다. 반면에 5세기 가야지역 중에서 산간내륙지방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고분이 각처에 번성하여, 고분유적이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고분들의 규모도 전시대에 비하여 매우 커져서 고령·거창·함양 등지에 봉토 직경 20∼30 미터 이상에 이르는 高塚古墳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고분 내부구조나 유물의 성격면에서 신라문화권의 고분들과는 구별된다. -출전- 김태식 「가야연맹사」『일조각』,1993, p88
백제는 475년에 웅진에 천도한 이후, 『일본서기』顯宗 3년(487) 是歲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섬진강수계를 따라 동진 또는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6세기 초경에 남원 등의 가야계 소국을 통합하고, 529년까지 滯沙地域(韓多沙 : 하동)으로는 남하를 완료하였으며, 이제 섬진강을 건너 安羅國을 위협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출전- 이영식「가야 각국사의 재구성」『문헌으로 본 가락국사』혜안 2000
. 4세기말 ∼ 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 21번 同一한 記事
가야의 중심 세력이 헤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 5세기 가야지역의 유적상황은 4세기 이전에 비하여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우선 패총 및 대형목곽분 등이 다량 출토되던 김해를 중심한 경남 해안지대에서는 5세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고분유적의 수효가 줄어들고 규모도 소형석곽분 정도로 위축되었다. 반면에 5세기 가야지역 중에서 산간내륙지방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고분이 각처에 번성하여, 고분유적이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 고분들의 규모도 전시대에 비하여 매우 커져서 고령·거창·함양 등지에 봉토 직경 20∼30 미터 이상에 이르는 高塚古墳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고분 내부구조나 유물의 성격면에서 신라문화권의 고분들과는 구별된다. -출전- 김태식 「가야연맹사」『일조각』,1993,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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