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여러 움직임들이 있었다. 다양한 운동 세력들이 당재건 준비기관을 설치하였으나 계속되는 일제의 간섭으로 파괴됨에 따라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은 조직의 결성, 실패의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파벌 청산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정리위원회는 오히려 코민테른에 의해 파벌로 규정되어 해산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결성되던 조공 재건준비위원회는 중국공산당 만주위원회가 중국공산당에의 합류를 주장한 화요파와 ML파는 지지하고 그를 반대한 서울파, 상해파는 압력을 가함에 따라 내부 분열이 야기되어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한편 1930년 3월에 코민테른이 '1국 1당의 원칙'-스탈린의 '민족문제테제'에 기초하여 나온 외국에 거주하는 자는 주재국의 노동자 농민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국제주의 관철요구- 을 내세우자 해외 주재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해외본부-만주총국, 일본총국등-를 해체하고 해당국가의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국의 경우 만주 총국이 해체되고 나서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의하여 간도 5 30 기념봉기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일제는 전경찰력을 동원해 이를 '간도 공산당사건'으로 확대, 조작하여 조선인 당원들을 검거하였다. 더구나 조선인 당원에 대한 중국관헌의 탄압도 심화되자 국내에 잠입한 일부 당원들이 중국공산당 국내 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이도 얼마 못 가 일제의 검거로 파괴되었다. 게다가 이 조직은 코민테른의 '1국 1당의 원칙'에 배치될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주체성 결여를 드러내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비판을 받고 있다.
4. 1920년대 운동의 한계
1920년대에 이렇듯 합법적인 활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려던 노력들은 직접적으로는 일제의 무차별적이고 극심한 탄압으로 또는 자체내의 분파 투쟁, 내부 갈등으로 무너져 갔다. 서울파, 화요파, ML파등은 혁명에 대한 의욕은 왕성하였으나 분파의 통합을 위한 현실적인 시도에 있어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조선공산당 지부 승인 취소 및 당조직의 해산을 야기시키고 만다. 나아가서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이 코민테른의 영향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조직의 정통성이 국내적 상황과는 다소 무관하게 코민테른의 승인으로만 결정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이를 과도하게 추구한 것이라던가 이들 외부 세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어떠한 주체적 고민 없이 그들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그들의 태도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구체적으로 코민테른이 내세운 여러 가지 테제들에서 발견되는 결함들을 간단히 살펴 보자. 먼저 '1국 1당의 원칙'이란 것은 한국의 특수 상황, 말하자면 일본의 탄압으로 자국 내 운동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외에 국내 운동의 근거지를 두는 것이 필요한 그러한 상황을 경시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하여 바로 만주 총국을 해체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사실들은 사대주의적이고 맹목적인 그들의 운동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12월 테제의 경우 분파 투쟁등에 대한 정확한 지적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의 현실이나 능력등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당시의 국내 대중운동의 성장 면모를 직시하지 못했으며 노농대중 속으로 침투해 당을 건설한다는 당시의 상황으론 역부족인 투쟁방침을 정했다는 것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은 즉시 충실하게 따르는 여전히 과의존적인 양상을 보였다. 조선 공산당 재건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까지 17년 동안이나 이룩되지 못한 것은 이런 실패 요인들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고찰이 부족했기 때문인 듯하다.
5. 1930년대 초반 -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을 기초로 한 민족해방운동
1930년대에는 20년대의 실패 경험과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기초하여-더 구체적으로는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와 범태평양 노동조합 비서부의 '태로 10월 서신'에 의해-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을 기반으로 비합법활동에 중점을 둔 조공 재건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지역별로 훈련된 지식인등이 노동의 현장에 투입되어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활성화시키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이도 역시 일본의 감시를 피할 순 없었다. 흥남적색노동조합사건 등 일본의 검거활동에 의해 많은 구성원들이 투옥되는 사태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흥남 뿐 아니라 원산적색노조사건이나 평양이나 신의주에서 있었던 많은 적색 운동들이 일본의 검거로 타격을 입었지만 집요하게 그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맥을 이었다.
1930년대 당시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 재건과 적색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서클이 다수 조직되었다. 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이재유, 이관술의 조선공산당 재건 및 적색노동조합운동이었다. 이들은 서울의 각 공장에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일부의 고등보통학교에서 적색독서회 또는 반제학생동맹을 조직하여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고 교양선전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다수의 노동자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최대 규모였던 '이재유사건'의 경우 검거 투옥된 자는 약 8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남부지방에서는 적색노조운동이 적색농민조합운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다. 농민의 경우에는 직업의 특성상 - 생산수단의 소유 정도나 경영 규모의 차별성 및 상호경쟁하는 지위 - 뭉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남부 지방에서의 농민 운동의 성과는 과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 무대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써클과 적색노조운동추진자가 당 재건 헤게모니를 장악한 반면 농민조합운동 지도자는 극히 소수일 뿐이어서 당시 총인구의 80%에 해당한 농민의 운동을 경시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0년대 들어서 이렇게 활발히 진행되던 적색노조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은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37년경을 경계로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현대 한국 정치론 「법문사」
논문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 임 경석
논문 '일제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의 시대' 손 형부
한편 1930년 3월에 코민테른이 '1국 1당의 원칙'-스탈린의 '민족문제테제'에 기초하여 나온 외국에 거주하는 자는 주재국의 노동자 농민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국제주의 관철요구- 을 내세우자 해외 주재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해외본부-만주총국, 일본총국등-를 해체하고 해당국가의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국의 경우 만주 총국이 해체되고 나서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의하여 간도 5 30 기념봉기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일제는 전경찰력을 동원해 이를 '간도 공산당사건'으로 확대, 조작하여 조선인 당원들을 검거하였다. 더구나 조선인 당원에 대한 중국관헌의 탄압도 심화되자 국내에 잠입한 일부 당원들이 중국공산당 국내 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이도 얼마 못 가 일제의 검거로 파괴되었다. 게다가 이 조직은 코민테른의 '1국 1당의 원칙'에 배치될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주체성 결여를 드러내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비판을 받고 있다.
4. 1920년대 운동의 한계
1920년대에 이렇듯 합법적인 활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려던 노력들은 직접적으로는 일제의 무차별적이고 극심한 탄압으로 또는 자체내의 분파 투쟁, 내부 갈등으로 무너져 갔다. 서울파, 화요파, ML파등은 혁명에 대한 의욕은 왕성하였으나 분파의 통합을 위한 현실적인 시도에 있어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조선공산당 지부 승인 취소 및 당조직의 해산을 야기시키고 만다. 나아가서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이 코민테른의 영향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세를 감안하더라도 조직의 정통성이 국내적 상황과는 다소 무관하게 코민테른의 승인으로만 결정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이를 과도하게 추구한 것이라던가 이들 외부 세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어떠한 주체적 고민 없이 그들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그들의 태도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구체적으로 코민테른이 내세운 여러 가지 테제들에서 발견되는 결함들을 간단히 살펴 보자. 먼저 '1국 1당의 원칙'이란 것은 한국의 특수 상황, 말하자면 일본의 탄압으로 자국 내 운동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외에 국내 운동의 근거지를 두는 것이 필요한 그러한 상황을 경시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이를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 수용하여 바로 만주 총국을 해체하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사실들은 사대주의적이고 맹목적인 그들의 운동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12월 테제의 경우 분파 투쟁등에 대한 정확한 지적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의 현실이나 능력등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당시의 국내 대중운동의 성장 면모를 직시하지 못했으며 노농대중 속으로 침투해 당을 건설한다는 당시의 상황으론 역부족인 투쟁방침을 정했다는 것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은 즉시 충실하게 따르는 여전히 과의존적인 양상을 보였다. 조선 공산당 재건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까지 17년 동안이나 이룩되지 못한 것은 이런 실패 요인들에 대한 역사적 반성과 고찰이 부족했기 때문인 듯하다.
5. 1930년대 초반 -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을 기초로 한 민족해방운동
1930년대에는 20년대의 실패 경험과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기초하여-더 구체적으로는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와 범태평양 노동조합 비서부의 '태로 10월 서신'에 의해-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을 기반으로 비합법활동에 중점을 둔 조공 재건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지역별로 훈련된 지식인등이 노동의 현장에 투입되어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활성화시키고 기관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이도 역시 일본의 감시를 피할 순 없었다. 흥남적색노동조합사건 등 일본의 검거활동에 의해 많은 구성원들이 투옥되는 사태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흥남 뿐 아니라 원산적색노조사건이나 평양이나 신의주에서 있었던 많은 적색 운동들이 일본의 검거로 타격을 입었지만 집요하게 그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맥을 이었다.
1930년대 당시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 재건과 적색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서클이 다수 조직되었다. 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이재유, 이관술의 조선공산당 재건 및 적색노동조합운동이었다. 이들은 서울의 각 공장에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일부의 고등보통학교에서 적색독서회 또는 반제학생동맹을 조직하여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고 교양선전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다수의 노동자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최대 규모였던 '이재유사건'의 경우 검거 투옥된 자는 약 8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남부지방에서는 적색노조운동이 적색농민조합운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전개되는 특징을 보였다. 농민의 경우에는 직업의 특성상 - 생산수단의 소유 정도나 경영 규모의 차별성 및 상호경쟁하는 지위 - 뭉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남부 지방에서의 농민 운동의 성과는 과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 무대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써클과 적색노조운동추진자가 당 재건 헤게모니를 장악한 반면 농민조합운동 지도자는 극히 소수일 뿐이어서 당시 총인구의 80%에 해당한 농민의 운동을 경시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30년대 들어서 이렇게 활발히 진행되던 적색노조운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은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37년경을 경계로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현대 한국 정치론 「법문사」
논문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 임 경석
논문 '일제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의 시대' 손 형부
추천자료
1940년대 좌우 합작운동
서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
[근현대사의 이해] 신간회와 좌우 합작 운동
[항일운동, 천도교 및 조국광복회, 의병활동, 무장독립군, 김일성]항일운동과 천도교 및 조국...
[항일학생운동, 광주항일학생운동]항일학생운동(광주항일학생운동)의 방향, 항일학생운동(광...
해방 전후사의 인식 -좌우 합작 운동-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1920년대 만주 연해주 일대의 민족 독립 운동)
1910년대의 민족 독립 운동
[한국민족운동사] 1930년대 항일무장 운동 단체(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한국민족운동사]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운동 (국내 비밀단체들의 활동, 해외 독립군부대의 ...
[한국민족운동사] <3·1운동의 전개> 31운동,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독립선언서, 만세운동의...
한민족 전쟁사 - 항일 의병전쟁 : 항일운동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 독립군 항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