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어미가 자식 키우는 정은 짐승도 마찬가지인데 학문을 한다는 유가의 체통으로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더냐! 몇 달을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더 자랄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 때 가서 데리고 가도록 하마."
하고 손자를 타일렀다.
그 후 겨울과 봄은 어렵게 넘겼지만 창양은 증조부를 보지도 못한 채 1570년 5월 23일 죽고 말았다. 퇴계는 그 아픔을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나, 여러 문인들에게 아픈 심정을 여러 번 토로하였다.
이렇듯 퇴계 이황 선생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인격자였다. 여기에 더해 자신보다 20살 이상이나 어린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을 서신으로 8년이나 걸쳐서 하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느끼면 자신의 생각을 고쳐가며 했던 것은 정말로 진정한 학자의 열린 자세와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는 있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학풍이 선배를 존중하는 것이 지나쳐서 자신의 주장이 다를 경우 제대로 주장이 힘들었는데 퇴계 이황 선생이 이 학풍을 앞장서 바꾸어 나간 것은 후세의 성리학이 경직화되어 과도하게 보수화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패기만만한 소장학자의 주장을 꺽지 않고 서로 논쟁하는 이런 열린 자세야말로 퇴계 이황 선생이 대학자로 올라선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황선생이 후세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 하고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 하여 존신(尊信)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하여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하였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 (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 호경재 (胡敬齋)와 명말 청초의 육가서(陸稼書), 장양원(張楊園)과 비교 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 (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 (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 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후세의 학자들이 퇴계의 학문은 계승하였으나 퇴계 이황 선생의 열린 학풍을 계승하지 않고, 임진왜란으로 심화된 양반 지배 체제의 모순을 더욱 성리학의 경직화로 대처한 것이다. 다른 학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을 뛰어넘어 양명학, 천주학 등을 말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단지 양명학의 연구만으로도 관직도 없던 유명한 유학자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로 성리학의 사상의 경직화는 심화되어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상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그렇지 못한 것은 결국 망국으로 나라를 이끌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퇴계 이황의 사상은 구한말 위정 척사 사상으로 이어져 망국의 위기에 대항한 의병 활동 초기의 근간이 되었으나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유학자들이 외부 세계의 침략을 선진 문물의 도입과 새로운 사상의 도입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쇄국 정책을 고집한 것은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고 생각된다. 이황의 학문만이 아니라 열린 학풍을 계승하지 않았던 점이 후세의 성리학자들의 가장 큰 잘못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일 이런 열린 학풍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지금의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가 되는 역사가 어쩌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망국의 원인을 모두 성리학에만 돌리는 것은 자칫 일제의 식민 사관의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고 손자를 타일렀다.
그 후 겨울과 봄은 어렵게 넘겼지만 창양은 증조부를 보지도 못한 채 1570년 5월 23일 죽고 말았다. 퇴계는 그 아픔을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나, 여러 문인들에게 아픈 심정을 여러 번 토로하였다.
이렇듯 퇴계 이황 선생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인격자였다. 여기에 더해 자신보다 20살 이상이나 어린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을 서신으로 8년이나 걸쳐서 하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느끼면 자신의 생각을 고쳐가며 했던 것은 정말로 진정한 학자의 열린 자세와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이는 있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학풍이 선배를 존중하는 것이 지나쳐서 자신의 주장이 다를 경우 제대로 주장이 힘들었는데 퇴계 이황 선생이 이 학풍을 앞장서 바꾸어 나간 것은 후세의 성리학이 경직화되어 과도하게 보수화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패기만만한 소장학자의 주장을 꺽지 않고 서로 논쟁하는 이런 열린 자세야말로 퇴계 이황 선생이 대학자로 올라선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황선생이 후세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 하고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 하여 존신(尊信)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하여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하였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 (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 호경재 (胡敬齋)와 명말 청초의 육가서(陸稼書), 장양원(張楊園)과 비교 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 (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 (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 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후세의 학자들이 퇴계의 학문은 계승하였으나 퇴계 이황 선생의 열린 학풍을 계승하지 않고, 임진왜란으로 심화된 양반 지배 체제의 모순을 더욱 성리학의 경직화로 대처한 것이다. 다른 학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을 뛰어넘어 양명학, 천주학 등을 말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단지 양명학의 연구만으로도 관직도 없던 유명한 유학자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로 성리학의 사상의 경직화는 심화되어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상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그렇지 못한 것은 결국 망국으로 나라를 이끌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퇴계 이황의 사상은 구한말 위정 척사 사상으로 이어져 망국의 위기에 대항한 의병 활동 초기의 근간이 되었으나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유학자들이 외부 세계의 침략을 선진 문물의 도입과 새로운 사상의 도입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쇄국 정책을 고집한 것은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다고 생각된다. 이황의 학문만이 아니라 열린 학풍을 계승하지 않았던 점이 후세의 성리학자들의 가장 큰 잘못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일 이런 열린 학풍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지금의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망하고 식민지가 되는 역사가 어쩌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망국의 원인을 모두 성리학에만 돌리는 것은 자칫 일제의 식민 사관의 논리를 정당화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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