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4편, 수필 3편 등 10편이 현재까지 발견된 그의 친일 작품이다. 그럼에도 주요 친일단체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나이가 젊고 문단 비중이 미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일제의 협박, 공갈 등 피치못할 사정으로 친일에 이름을 내건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서정주의 경우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 「교과서와 친일문학」 : 1988. 1. 19 교육출판 -
* 서정주의 처녀시집 <화사집>이 출간된 것이 1941년. 미당의 담시(譚詩)로 엮은 자서전 <팔할이 바람>에 의하면 <화사집>은 1백부 한정판으로 특제본 35부, 병제본 65부를 발행했다. 특제본은 화가들의 캔버스용 천으로 포장하고 그 등때기는 최상질의 백색 명주에 주홍실로 수를 놓은 제목을 새겼으며, 본문의 종이는 전주대지를 여려 겹으로 부해서 다듬이질한 뒤 다시 다리미로 다린 호화 장정본이었다. 병제본은 제목 글씨를 시인 정지용이 썼다.
시집이 나오자 당시 서울의 제일급 요정이던 명월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김기림, 임화, 김광균, 오장환 등 당대의 시인 9명이 모였다. 서정주문학은 첫발부터 이런 성장(盛裝)이었던 것이다. <화사집>에는 23세 때까지 쓴 초기 시 24편이 실려 있었다. 이 시집의 원색적이고 유미주의적 감각의 시풍은 당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한국의 보들레르'가 탄생했다고들 했다.
미당은 그 이래 여러 시집을 통해 심화된 정서와 민족적 선율로 한국시의 지주를 견지하여 우리 시단을 주도해 왔다. 그는 신시 80년 역사 가운데 50여 년 동안이나 꾸준히 시업(詩業)을 이어오며 76세가 된 금년 들어서도 새 시집 <산시(山詩)>를 낸 우리 시단의 기숙(耆宿)이다.(중략)
국정의「국어」에는 통틀어 이 시인의 시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고 검인정「문학」은 8종 가운데 단 3종에만 그의 시가 한 편씩 보일 뿐인데다 그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미당은 제5공화국 시절의 친정권적 발언으로 일부 세력의 지탄을 받아 왔다. 여러 소장 시인들이 그를 이반했다. 그 서릿발에 지금도 숨죽여 살아온다.
한 시인의 정치적인 입장은 전혀 자유스러운 것이다. 강압에 굴한 것이 아니고 치부나 지위를 탐한 것이 아니라면 그로서는 '정직'이었을 것이다. 소신일 수 있다. 시를 팔지도 않았다. 그의 시정신은 항상 맑았다. 설령 시인의 자세를 꼿꼿하게 보지 못하는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화를 위한 갈등이었다면 지금은 민주화의 시대다. 적과도 공존하는 것이 민주화 다. 화해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어떤 비평가는 <화사집>의 맨 첫머리에 나오는 시 <자화상>이 미당 자신의 운명을 숙명적으로 예지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이제 우리의 노시인을 더 이상 서럽게 하지 말자. 이 땅의 생존 시인 이름 하나만 들라면 서정주 말고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 그가 우리의 시인이 아니라고 우겨도 우리 시사(詩史)는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우리 나라 시인치고 미당의 시 그늘 아래서 자라지 않은 시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는 이 나라의 시인들을 길러왔다. 시인뿐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운에 적셔져 있다. 우리의 국민적 정조는 그의 시 없이 이만큼의 물기가 없었을 것이다.(하략)
- '金聖佑 문화칼럼' : 「한국 일보」 1991. 6. 3 -
당시 상황으로 보아 일제의 협박, 공갈 등 피치못할 사정으로 친일에 이름을 내건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서정주의 경우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 「교과서와 친일문학」 : 1988. 1. 19 교육출판 -
* 서정주의 처녀시집 <화사집>이 출간된 것이 1941년. 미당의 담시(譚詩)로 엮은 자서전 <팔할이 바람>에 의하면 <화사집>은 1백부 한정판으로 특제본 35부, 병제본 65부를 발행했다. 특제본은 화가들의 캔버스용 천으로 포장하고 그 등때기는 최상질의 백색 명주에 주홍실로 수를 놓은 제목을 새겼으며, 본문의 종이는 전주대지를 여려 겹으로 부해서 다듬이질한 뒤 다시 다리미로 다린 호화 장정본이었다. 병제본은 제목 글씨를 시인 정지용이 썼다.
시집이 나오자 당시 서울의 제일급 요정이던 명월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김기림, 임화, 김광균, 오장환 등 당대의 시인 9명이 모였다. 서정주문학은 첫발부터 이런 성장(盛裝)이었던 것이다. <화사집>에는 23세 때까지 쓴 초기 시 24편이 실려 있었다. 이 시집의 원색적이고 유미주의적 감각의 시풍은 당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한국의 보들레르'가 탄생했다고들 했다.
미당은 그 이래 여러 시집을 통해 심화된 정서와 민족적 선율로 한국시의 지주를 견지하여 우리 시단을 주도해 왔다. 그는 신시 80년 역사 가운데 50여 년 동안이나 꾸준히 시업(詩業)을 이어오며 76세가 된 금년 들어서도 새 시집 <산시(山詩)>를 낸 우리 시단의 기숙(耆宿)이다.(중략)
국정의「국어」에는 통틀어 이 시인의 시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고 검인정「문학」은 8종 가운데 단 3종에만 그의 시가 한 편씩 보일 뿐인데다 그의 대표시 <국화 옆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미당은 제5공화국 시절의 친정권적 발언으로 일부 세력의 지탄을 받아 왔다. 여러 소장 시인들이 그를 이반했다. 그 서릿발에 지금도 숨죽여 살아온다.
한 시인의 정치적인 입장은 전혀 자유스러운 것이다. 강압에 굴한 것이 아니고 치부나 지위를 탐한 것이 아니라면 그로서는 '정직'이었을 것이다. 소신일 수 있다. 시를 팔지도 않았다. 그의 시정신은 항상 맑았다. 설령 시인의 자세를 꼿꼿하게 보지 못하는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화를 위한 갈등이었다면 지금은 민주화의 시대다. 적과도 공존하는 것이 민주화 다. 화해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어떤 비평가는 <화사집>의 맨 첫머리에 나오는 시 <자화상>이 미당 자신의 운명을 숙명적으로 예지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이제 우리의 노시인을 더 이상 서럽게 하지 말자. 이 땅의 생존 시인 이름 하나만 들라면 서정주 말고 누구를 내세울 것인가. 그가 우리의 시인이 아니라고 우겨도 우리 시사(詩史)는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우리 나라 시인치고 미당의 시 그늘 아래서 자라지 않은 시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그는 이 나라의 시인들을 길러왔다. 시인뿐 아니라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운에 적셔져 있다. 우리의 국민적 정조는 그의 시 없이 이만큼의 물기가 없었을 것이다.(하략)
- '金聖佑 문화칼럼' : 「한국 일보」 1991. 6.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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