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3) 어떤 쾌락이든지 그 어떤 기술의 소산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아주 당연한 사리이다. 도대체 다른 어떤 활동에도 그것의 기술이란 것이 없다. 다만 그 활동에 대응하는 능력에 는 그 기술이 있다.
(4) 또 절제 있는 사람은 쾌락을 피하며, 사려있는 사람은 고통 없는 생활을 추구하며, 어린 아이들과 짐승들은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는 여러 근거에서 전개되는 주장들은 모두 위와 같은 논박으로 해소된다. 짐승과 어린 아이들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방종한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절제 있는 사람은 이런 쾌락을 피한다. 그는 또 자기 나름의 쾌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 13장
(5) 고통은 나쁜 것이며,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함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런데 피해야 할 것의 반대는 좋은 것, 즉 선이다. 그러므로 쾌락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선이다.
(6) 어떤 쾌락이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어떤 쾌락이 최고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제 14장
(7) 방종한 사람이 추구하는 쾌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논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왜 그런 쾌락에 반대되는 고통은 나쁜 것인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진리만이 아니라 또한 오류의 원인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릇된 견해가 왜 참된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데 대해서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되면 참된 견해에 대한 믿음이 증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육체적 쾌락이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는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a) 첫째로, 그것은 쾌락이 고통을 몰아내는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지나치게 경험하는 까닭에, 그 치유챤으로서 지나친 쾌락과 또 일반적으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 여러 가지 치유책은 고통에 대한 반동이기 때문에 강렬한 감정을 낳는다. 그러기에 쾌락이 추구되는 것이다.
(b) 또 육체적 쾌락은 격렬한 것이므로, 다른 쾌락에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그 빡의 다른 것에 기쁨을 전혀 맛볼 수 없는데다가. 이도 저도 아닌 중성적인 상태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게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거기에 반대되는 쾌락에 의해서도 제거되고, 또 강렬한 것이기만 하면 그 어떤 쾌락에 의해서도 제거되는 법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방종하게 되고 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관계없는 쾌락에는 과도란 게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쾌락은 본성적으로 쾌적한 것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요, 수반적으로 쾌적한 것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항상 쾌적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우리 본성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두 요소가 균등하게 균형이 잘 잡히면 그 때 행한 일은 고통스러운 것으로도 쾌적한 것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이상으로 우리는 자제와 자제력이 없음, 쾌락과 고통에 관해서 그것들이 각기 어떤 것이며, 또 어느 의미에서 그 중의 어떤 것이 좋으면 어떤 것이 나쁜가를 논하였다.
(3) 어떤 쾌락이든지 그 어떤 기술의 소산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아주 당연한 사리이다. 도대체 다른 어떤 활동에도 그것의 기술이란 것이 없다. 다만 그 활동에 대응하는 능력에 는 그 기술이 있다.
(4) 또 절제 있는 사람은 쾌락을 피하며, 사려있는 사람은 고통 없는 생활을 추구하며, 어린 아이들과 짐승들은 쾌락을 추구한다고 하는 여러 근거에서 전개되는 주장들은 모두 위와 같은 논박으로 해소된다. 짐승과 어린 아이들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방종한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절제 있는 사람은 이런 쾌락을 피한다. 그는 또 자기 나름의 쾌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 13장
(5) 고통은 나쁜 것이며, 피해야 할 것이라고 함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런데 피해야 할 것의 반대는 좋은 것, 즉 선이다. 그러므로 쾌락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선이다.
(6) 어떤 쾌락이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어떤 쾌락이 최고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제 14장
(7) 방종한 사람이 추구하는 쾌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논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왜 그런 쾌락에 반대되는 고통은 나쁜 것인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진리만이 아니라 또한 오류의 원인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릇된 견해가 왜 참된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데 대해서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되면 참된 견해에 대한 믿음이 증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육체적 쾌락이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는가를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a) 첫째로, 그것은 쾌락이 고통을 몰아내는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지나치게 경험하는 까닭에, 그 치유챤으로서 지나친 쾌락과 또 일반적으로 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 그런 여러 가지 치유책은 고통에 대한 반동이기 때문에 강렬한 감정을 낳는다. 그러기에 쾌락이 추구되는 것이다.
(b) 또 육체적 쾌락은 격렬한 것이므로, 다른 쾌락에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그 빡의 다른 것에 기쁨을 전혀 맛볼 수 없는데다가. 이도 저도 아닌 중성적인 상태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게 때문이다. 그런데 고통은 거기에 반대되는 쾌락에 의해서도 제거되고, 또 강렬한 것이기만 하면 그 어떤 쾌락에 의해서도 제거되는 법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방종하게 되고 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관계없는 쾌락에는 과도란 게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쾌락은 본성적으로 쾌적한 것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요, 수반적으로 쾌적한 것들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항상 쾌적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우리 본성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두 요소가 균등하게 균형이 잘 잡히면 그 때 행한 일은 고통스러운 것으로도 쾌적한 것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이상으로 우리는 자제와 자제력이 없음, 쾌락과 고통에 관해서 그것들이 각기 어떤 것이며, 또 어느 의미에서 그 중의 어떤 것이 좋으면 어떤 것이 나쁜가를 논하였다.
추천자료
[독후감] 청춘의 덫 - 윤리적 비판보고서
Kant의 윤리설과 선의지에 대한 의의
비극 안티고네를 읽고 -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을 중심으로
철학과 신학의 차이점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사상 - 행복, 덕
사이버 강의 <나의 삶과 윤리> 중간고사
아리스토텔레스의 eudaimonia
[철학]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 행복론, 행복 만들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플라톤의 생애와 윤리사상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센과_치히로에_나타난_개인과_공동체,_그리고_국가
공연예술의 이해와 감상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정리에 따라...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