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본 론
•미소양국의 분할점령
•미소공동위원회 실패
•이승만의 귀국과 활동
•이승만의 워싱턴 로비 활동
•이승만의 입법의원 원격조정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국제연합에 넘어간 한국문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실시
•이승만 대통령 당선
•참고자료
결 론
본 론
•미소양국의 분할점령
•미소공동위원회 실패
•이승만의 귀국과 활동
•이승만의 워싱턴 로비 활동
•이승만의 입법의원 원격조정
•좌우합작운동의 실패
•국제연합에 넘어간 한국문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실시
•이승만 대통령 당선
•참고자료
결 론
본문내용
더불어 김구의 반탁 노선에 동조하였으나 처음부터 이에 소극적이었고, 급다는 반공과 반소의 일관된 노선을 견지하였다. 그는 좌우 연합의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여 자신을 정점으로 한 단정 수립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좌익은 찬탁으로의 노선 변경을 통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조선 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이 탁치가 아니라 후견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임시 정부의 수립을 탁치안보다 더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민족주의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대중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좌익은 임정에게 협력을 제외하고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주요 정당들과의 제휴를 추진하였으나 당시 반탁으로 기세를 올린 임정 세력과 한민당이 이를 거부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익의 각 세력들은 우파의 결ㅈㅂ에 대항하기 위해 1946년 2월 15일 '남조선 민주 민족 전선'(민전)을 결성하였다. 정국은 민주 의원의 우익과 민전의 좌익 간의 팽팽한 대치 상태로 돌입하였다.
3)우파 득세기(1946년 5월 ~ 1947년 9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1946년 중반 워싱턴 당국은 남한 강화와 중간파 육성을 골자로 한 새로운 대한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남한에 안정되고 강력한 행정 기구를 건설하고 경제 지원을 함으로써 대소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는 동시에 극좌와 극우 세력을 모두 배재하고 중간파 중심의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모스크바 합의를 관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정책 전화 중에서 정국의 구도에 가장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은 좌우 합작의 추진이었다. 미죽 정부는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소련과의 협상을 가능케 하고, 온건 우파 세력으로써 공산주의자에 유효히 대처하며, 친미적 입장에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는 중간파를 내세워 공위에서 미국의 입장을 관철하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좌우 합작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좌우 합작의 추진과 함께 미국은 '과도 입법 의원'을 창설하여 중간파를 육성하려 하였으나, 선거에서 대승한 우파 인사들이 이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은 단정 운동을 맹렬히 펼치기 시작해 정국을 파란으로 몰아갔다.
1946년 4월 전국 순회 강연을 시작으로 단정 운동을 본격화 한 그는 모스크바 협정을 파기하고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바탕으로 남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분단 국가 수립을 추진하였는데, 한편 즉각 독립의 구호가 대중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음도 사실이었다. 그의 단정 운동은 모스크바 협정 준수의 공식 입장을 아직 공개적으로 버리지 못하고 있던 미군정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할 것을 미국측에 종용하고있었다. 따라서 미,소 공위가 다시 개최되자 이를 결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의 제2차 미,소 공위가 이전의 그것과 같이 결실 없이 공전하자, 그의 정치적 승리는 굳어갔다.
이에 반해 김구는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정치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편 좌익 세력은 1946년 중반 이후 세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박헌영은 "정당 방위의 역공세"라는 구호 아래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를 포기하고 남한 사회의 폭력 혁명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이 노선은 미군정의 탄압을 야기하여 좌익 세력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10월 인민 봉기 실패의 결과 민전의 포용성이 와해되었으며, 공산당이 해체되고 보다 과격하고 배타적인 '남조선 노동당'이 탄생하였다.
4)단정 수립기(1947년 9월 ~ 1948년 8월)
5.10 총선거에서 우익이 거둔 완전한 승리로 남한에서의 분단국 수립은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우익의 승리를 의미했고, 정치 권력의 측면에서는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뜻했다. 우익 국가의 탄생 속에서 민간 사회는 침체로 복귀했다. 해방 후 3년에 걸친 좌우익의 투쟁과 미,소의 대립은 남에서의 미국 보호하의 우익 정권 탄생과 북에서의 소련 비호하의 공산 정권 탄생으로 일단락되었다.
결 론
해방 후 3년간의 미소양국의 군정기간을 거치면서 이승만이 수립한 남한단독정부에 대해 평가해보고자 한다.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은 6.25전쟁 등 수많은 민족의 아픔을 가져다주면서 6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1945년부터 1948년 남한단독정부수립까지의 3년간 한국과 국제사회의 입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 세계열강들의 제국주의,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 그리고 국내 지도층의 분열된 모습 등 국내적, 국외적 문제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 하는데 에는 있어서 선 남한 정부 수립 후 북한을 흡수 그리고 국제 연합을 통한 미소양국의 군대 철수라는 내막이 깔려 있었을 거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승만의 예견은 정권 획득이후 독재라는 멍애를 가지면서 옛날이야기로 사라졌으며, 그 뒤의 지도자들도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했고 지금 우리는 그를 평가하고자 한다.
현재, 이승만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측에서는 이승만을 당시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과 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인물로 바라보며, 다른 한 측에서는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친미주의와 친일파와 결속하여 성급한 정부수립을 하여 근대국가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주적으로 근대국가 단계에 들어섰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조선에서 뼈아픈 식민지시기를 지나 처음으로 자주적 정부 수립 단계 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에 의해 국가의 근대화가 이루어 졌으며, 해방 이후 국내 각계각층의 사상적 분열뿐만 아니라 미소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수립을 통한 국가 건설이 절실했던 시기였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좌익은 찬탁으로의 노선 변경을 통해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조선 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이 탁치가 아니라 후견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임시 정부의 수립을 탁치안보다 더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민족주의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대중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좌익은 임정에게 협력을 제외하고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주요 정당들과의 제휴를 추진하였으나 당시 반탁으로 기세를 올린 임정 세력과 한민당이 이를 거부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익의 각 세력들은 우파의 결ㅈㅂ에 대항하기 위해 1946년 2월 15일 '남조선 민주 민족 전선'(민전)을 결성하였다. 정국은 민주 의원의 우익과 민전의 좌익 간의 팽팽한 대치 상태로 돌입하였다.
3)우파 득세기(1946년 5월 ~ 1947년 9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1946년 중반 워싱턴 당국은 남한 강화와 중간파 육성을 골자로 한 새로운 대한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남한에 안정되고 강력한 행정 기구를 건설하고 경제 지원을 함으로써 대소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는 동시에 극좌와 극우 세력을 모두 배재하고 중간파 중심의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모스크바 합의를 관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정책 전화 중에서 정국의 구도에 가장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은 좌우 합작의 추진이었다. 미죽 정부는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소련과의 협상을 가능케 하고, 온건 우파 세력으로써 공산주의자에 유효히 대처하며, 친미적 입장에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는 중간파를 내세워 공위에서 미국의 입장을 관철하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좌우 합작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좌우 합작의 추진과 함께 미국은 '과도 입법 의원'을 창설하여 중간파를 육성하려 하였으나, 선거에서 대승한 우파 인사들이 이 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은 단정 운동을 맹렬히 펼치기 시작해 정국을 파란으로 몰아갔다.
1946년 4월 전국 순회 강연을 시작으로 단정 운동을 본격화 한 그는 모스크바 협정을 파기하고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바탕으로 남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분단 국가 수립을 추진하였는데, 한편 즉각 독립의 구호가 대중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음도 사실이었다. 그의 단정 운동은 모스크바 협정 준수의 공식 입장을 아직 공개적으로 버리지 못하고 있던 미군정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할 것을 미국측에 종용하고있었다. 따라서 미,소 공위가 다시 개최되자 이를 결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의 제2차 미,소 공위가 이전의 그것과 같이 결실 없이 공전하자, 그의 정치적 승리는 굳어갔다.
이에 반해 김구는 변화하는 국내외 정세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정치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편 좌익 세력은 1946년 중반 이후 세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박헌영은 "정당 방위의 역공세"라는 구호 아래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를 포기하고 남한 사회의 폭력 혁명 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이 노선은 미군정의 탄압을 야기하여 좌익 세력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겼다. 10월 인민 봉기 실패의 결과 민전의 포용성이 와해되었으며, 공산당이 해체되고 보다 과격하고 배타적인 '남조선 노동당'이 탄생하였다.
4)단정 수립기(1947년 9월 ~ 1948년 8월)
5.10 총선거에서 우익이 거둔 완전한 승리로 남한에서의 분단국 수립은 일단락되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우익의 승리를 의미했고, 정치 권력의 측면에서는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뜻했다. 우익 국가의 탄생 속에서 민간 사회는 침체로 복귀했다. 해방 후 3년에 걸친 좌우익의 투쟁과 미,소의 대립은 남에서의 미국 보호하의 우익 정권 탄생과 북에서의 소련 비호하의 공산 정권 탄생으로 일단락되었다.
결 론
해방 후 3년간의 미소양국의 군정기간을 거치면서 이승만이 수립한 남한단독정부에 대해 평가해보고자 한다.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은 6.25전쟁 등 수많은 민족의 아픔을 가져다주면서 6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1945년부터 1948년 남한단독정부수립까지의 3년간 한국과 국제사회의 입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 세계열강들의 제국주의,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 그리고 국내 지도층의 분열된 모습 등 국내적, 국외적 문제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 하는데 에는 있어서 선 남한 정부 수립 후 북한을 흡수 그리고 국제 연합을 통한 미소양국의 군대 철수라는 내막이 깔려 있었을 거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승만의 예견은 정권 획득이후 독재라는 멍애를 가지면서 옛날이야기로 사라졌으며, 그 뒤의 지도자들도 어떠한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했고 지금 우리는 그를 평가하고자 한다.
현재, 이승만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측에서는 이승만을 당시의 급박한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과 국가 건설에 이바지한 인물로 바라보며, 다른 한 측에서는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친미주의와 친일파와 결속하여 성급한 정부수립을 하여 근대국가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자주적으로 근대국가 단계에 들어섰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조선에서 뼈아픈 식민지시기를 지나 처음으로 자주적 정부 수립 단계 앞에 서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에 의해 국가의 근대화가 이루어 졌으며, 해방 이후 국내 각계각층의 사상적 분열뿐만 아니라 미소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수립을 통한 국가 건설이 절실했던 시기였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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