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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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삼국통일의 배경과 과정
1. 고구려와 당의 신라와의 관계
2. 나당(羅唐)군사동맹 체결
3. 백제의 정벌과 부흥 운동
4. 對 고구려 전쟁

Ⅲ.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의의

※참고문헌 1

본문내용

일로 인하여 부여어 계통인 고구려어는 사멸되었고 백제어도 인멸되어 오직 한족의 신라어가 한민족의 언어로 되어 단일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세맥(예맥, 부여)족과 마한족과 진한족 등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여러 민족이 신라라는 통일의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어 한민족을 형성했다. 이와 같이 한민족, 한국, 한국어, 한민족 문화의 창조라는 민족사의 거대한 공헌을 한 것이 신라의 통일이었다.
신라의 통일은 엄밀한 의미에서 백제만을 통일한 이국(二國)통일이었으며 원고구려의 광역은 제외했으나 신라는 일통삼함(一統三韓)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왕 안승(安勝)을 위시하여 많은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였으며 이들과 손잡고 당군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수했다.
민족사의 완전한 통일은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 이후 300년 만에 모순을 들어내어 후삼국 분열시대를 가져오게 했으며, 이후 삼국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부흥국인 고려에 의하여 일통삼한이 이루어지면서 완전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고려에 의한 2차의 일통삼한은 신라의 일통삼한이 있었음으로 가능했다. 그것은 신라 통일 강역 문화의 범주 내에서 통일을 이루어 고구려의 강역 인민을 포용하는 확대 통일이었다.
고려의 일통삼한으로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삼한은 한반도 전체의 삼국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신라의 일통삼한의 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의 삼한 즉 백제 신라 가야만을 지칭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삼국은 동족의식 통일의식이 전혀 없었다. 통일전쟁이 진행될 때 백제도 부여융에 의하여 백제의 고토와 조상의 제사가 유지되기를 바랐고 다시 백제국을 부흥시키려고 했으며 당도 이런 방향으로 움직였다. 백제 유민들의 격렬한 부흥 운동은 신라에 대한 극렬한 적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동족 동류 의식은 전무했다. 고구려의 安勝에게 고구려국을 만들어 준 신라와 안승집단의 사고 방식도 신라와 동족의식 병합의식은 전무했다.
이와 같은 삼국의 이국 이민족 의식을 신라의 통일은 동족의식 통일의식으로 만들어져서 결국에는 한민족 단일 통일국가로 이어졌다.
신라 통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을 민족의 자주 주체적 역량으로 이룩했다는 점이다. 당의 힘을 빌려 동족 국가를 격멸시킨 치욕의 사대적 통일로 인식하고, 만주의 광활한 고구려의 영토를 상실한 통일을 민족적인 감정에서 매도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은 결코 그와 같은 사대적 외세 통일이 아니었으며 동족 상잔의 통일도 아니었다. 앞에서 개진해 온 바와 같이 3국은 각각 이국(異國)이었고 이민족이었다. 따라서 동족상잔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신라에 의하여 통일했기 때문에 통일 후 같은 민족 같은 한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신라는 여제동맹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여제를 평정했으나 그후 8년간에 걸친 당과의 가열한 전쟁으로 당 군을 패강 이북으로 축출 소탕한 후에 민족 자력, 자주 주체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당시 당은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었다. 이 대당제국을 상대로 신라가 용감히 싸워 쟁취한 통일이었다. 결코 외세를 의지하고 외세를 빌린 통일이 아니었다.
한민족의 주체는 한족이었다. 한국사는 북방계 부여족(세백)과 한족의 남북 투쟁의 역사였고 이 투쟁에서 남부 한족의 승리였다. 이후 한국민족의 주류 원류는 한족이었고 한국민족 문화의 원류는 한 신라적 문화였다. 신라가 대당 통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을 성취한 것은 남방 한 신라적 한국 고대 전통 문화의 전면적 붕괴를 막고 이후 한 신라적 고대 문화의 한국화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고유한 민족적 전통문화의 계승이 가능하여져서 통일신라의 찬란한 민족문화, 고려 조선의 민족문화 창조에 공헌하게 되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성립될 수 없지만 7세기 중엽 고구려는 건국 700년의 역사를 가져 노쇠의 길을 걷고 있어 제반 모순의 노정으로 이미 통일의 여력은 없었고 내부의 분열과 국력의 피폐와 국가 기강의 해이로 쇠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만일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 의하여 한반도가 통일되었다면 오늘의 한국 민족문화와 민족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만주에서 일어난 고구려의 후신들인 발해, 요, 금, 청 등 대륙 제국이 중원을 지배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중원의 중국 속에 오히려 병합 용해되어 그들의 존재조차 찾을 수 없다.
다행히 한반도 남단 동남에 편재하여 가장 한국적 고대 문명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고 있던 한족 신라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반도 국가로 온전했으며, 민족 보위의 슬기로운 외교정책인 사대정책을 써왔기에 오늘날 우리 한국적 전통문화와 민족을 보존하게 되었다.
신라는 대당제국의 새로운 동북아질서 책봉체제의 수립에 기여했고 이에 협조 대응했다. 고구려 백제 일본의 연합군에 대하여 당 신라의 군사동맹과 공동전선의 전개는 당의 새로운 책봉체제의 수립에 참여하게 되었고 중국의 전통적 이이제이의 정책으로 고구려 백제 일본의 연합국을 신라라는 이(夷)로서 제압하여 신라가 쇠약함을 기화로 신라를 제압하고자 한 당의 전술이 신라의 완강한 대당전쟁의 승리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신라의 존재를 인정하여 한반도의 주체세력으로 대우하게 되고, 당 조공 제국 중 수위(首位)의 존재로 대우받고 이후 당의 세계질서 속에 300년의 평화시대를 구가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고구려, 백제, 당, 천축, 서역의 세계적인 문화의 수입과 융화를 이룬 세계적 신라문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로 한반도에 비로소 단일 역사, 단일 언어, 단일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는 단일 민족인 한민족이 형성되고 비로소 민족국가가 창건되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사상 최대 최고의 위대한 역사적 위업이었다. 그 후 안정적이지 못한 삼국통일로 300년 후 후삼국으로 분열 되었으나 신라의 통일은 고려의 민족 재통일의 모태였고, 최초의 민족 통일국가로서 그것만으로 역사적 의의는 충분하리라 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 김부식[지음] 이강래 옮김 한길사, 1998.
「신라삼국통일과 여. 제 패망 원인연구」 / 이호영 著. 서경문화사, 1997.

키워드

신라,   삼국통일,   삼국,   통일,   고구려,   ,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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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4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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