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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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복궁을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강했을까? 그림속의 일본 낭인은 영사 재판권에 따라 본국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8. 해치상
( 해치상, 정의를 수호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지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광화문 양쪽에는 해태상, 해치상으로 불리는 상상의 동물이 있다. 중국 요임금시대에 세상에 태어났고, 해천, 신양, 식죄, 해타 등으로 불리웠는데 '해태'랑 명칭은 어원이 불분명하다고 한다. 과거의 대화재를 의식하여 화마를 제압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 본성은 대단히 영물스럽고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성군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고,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덤비어 받아넘기는 '정의의 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치상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이세욱이라는 당대 뛰어난 석공에 의해 탄생하였다.
그런 정의의 동물 해치상 앞으로 태연히 걸어 들어가서 보란듯이 왕궁을 훼손시키는 일본인들을 두 마리가 감내하기엔 역부족 이었나보다. 참으로 슬픈 역사의 증인이 아닐 수 없다. 멋지게 해치상 밑에서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해치상 앞으로는 현재 한국의 정치 경제의 주요 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정부 종합청사부터 한국 경제의 중추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가운데를 해치가 사나운 눈매로 바라보고 있다. 물론 상상속의 동물이니 만큼 그 영험함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해치가 그 본래 속성대로 시비곡직을 판단하여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시비를 판단하여 채찍질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는 비단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9. 동십자각
경복궁의 엄연한 일부이면서도 경복궁이 아닌 건물, 건춘문을 나와서 한국일보사 사거리에는 을씨년스러운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동십자각이다. 원래는 경복궁의 동쪽 담과 남쪽 담이 만나는 모서리에 위치한다. 이를테면 궁궐의 외곽 경계를 표시하는 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삼청동 방면 도로 확장시에 궁의 동쪽 담을 안쪽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담장과 떨어지게 된 비운의 건물이다. 경복궁은 일제시대에도 전체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이제는 필요에 의해서 후손들에 의해 훼손된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판단이 어렵다.
( 저녁 무렵 차들 사이에 묻혀 고립된 동십자각, 너무나 슬프디 슬픈 광경이다.)
경복궁을 나와 지하철로 향하던 무렵 조사는 했었지만 막상 당일 날에도 기억하기 어려웠던 것이 동십자각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마저 알아주지 않는다면 내 평생 동십자각을 거론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사진에 담아 두었다. 아마도 이번 견학을 목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평생 경복궁의 일부가 아닌 교통의 사각지대에 건립한 미관을 위한 구조물로만 일평생 알고 지낼 뻔 했다. 과연 길 가던 행인을 붙잡고 저 건물이 뭔지 설명해달라고 하면 얼마나 정확하게 대답해 줄까?
10. 경복궁을 나서며...
( 나오기 전에 경복궁의 전면을 찍어 보았다. 석양을 배경으로 보이는 경복궁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각오를 다져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공부하고 갔던 경복궁은 기존 막연하게나마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단순한 조선 왕조의 왕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때 조선의 모든 역량을 부어 만든 조선 왕조의 광대함을 만방에 과시하던 힘의 상징이자, 국권 상실 후 처참하게 훼손된 오욕의 상징이기도 한 양면성을 지닌 장소였다.
따지고 보면 기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때는 왕궁을 버려두고 도망간 왕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낀 백성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인에 의해 훼손되었다. 결국 일본과는 악연인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가장 이상적인 터를 토대로 세워졌다. 왕가에 있어서 풍수지리는 왕실의 번영이라는 가문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입장에서 보국안민의 목적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왕실을 기반으로 하여 이상적 치세를 하여 결국 국가를 강건하게 유지함이 아마도 경복궁 건립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음을 지적한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것은 왕궁의 규모, 구조나 땅의 기운, 위치가 아니라 바로 그 나라의 정치를 책임지는 '인간'들의 의지라는 점이다. 자국의 위기 앞에 고위 정치인들의 삼분오열된 추태는 결국 국권을 상실케 하고 말았다. 물론 모든 탓을 정치인들에게만 전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역사의 결과는 우연이나 특정 사건보다는 당시 제반적 상황의 결과물로서 이해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사뿐만 아니라 과거 여러 왕조들의 패망의 원인으로 가장 손꼽히는 것은 지배층의 분열 및 가렴주구로 인한 민족 역량의 소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우리 근대사에서도 지배층에게도 상당한 책임을 물어야할 여지가 많다.
오늘도 이 땅을 책임질 수많은 사람들이 경복궁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역사의 순환을 보듯이 또한 경복궁 앞에는 정부종합청사, 그리고 뒤에는 청와대가 위치하여 경복궁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정치와 너무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듯하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경복궁에게 과거처럼 무슨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임진왜란 때는 주인이 도망가고 성난 군중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들어 자신을 태웠고, 일제 강점기에는 타국인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이제 새로운 주인들이 자신의 앞, 뒤에 자리를 잡았는데, 과연 경복궁에게 어떠한 모습을 보여줄지 의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경복궁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었나 하는 점에만 관심을 가져온 것 같다. 이를 테면 어떤 자리는 국난시에 비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 그리고 그 초점이 일본의 침탈 만행에 모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모든 일차적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았나 하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경복궁의 모습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본래의 임무에서 벗어나 유유히 휴식기에 접어든 경복궁에게 좀 더 강건하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가져 본다.
참고 서적
1. 서울의 고궁 산책, 허균, 효림
2.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이덕일, 이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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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4.06.29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8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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