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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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스파르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서론

요약
제1장 서론
제2장 스파르타인
제3장 페리오이코이, 헤일로타이, 열등시민
제4장 스파르타의 정치제제(1) 부족, 왕, 감독관
제5장 스파르타의 정치제제(2) 장로회, 민회, 민사적 사법적 기능
제6장 스파르타식 훈련
제7장 스파르타의 토지보유제도
제8장 스파르타의 육군과 해군조직
제9장 공동식사
제10장 화폐와 공공재정
제11장 아기스 - 클레오메네스 - 나비스

결론

본문내용

자금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방식은 전쟁 비용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체제는 사실 아주 원시적이고 경제조직의 서투른 모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11장 아기스-클레오메네스-나비스
⊙ 스파르타의 쇠퇴: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에서의 패배 이후 10년도 안 되어 스파르타는 세 번이나 침략을 당했다. 메세니아를 상실했고 이에 따라 스파르타 시민들의 토지도 함께 읽어버렸다. 이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경제적 손실이었고 심각한 사회적 상황의 악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 아기스왕: 20세도 안된 젊은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관대하며 충동적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을 다루는 경험이 없었고 위기가 왔을 때 통제하기 없게 되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 클레오메네스3세: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집권 당시의 조국의 타락한 상태는 이 성급하고 열렬한 청년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었다. 클레오메네스의 쿠데타는 그 같은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 스파이로스와 스토아 철학: 클레오메네스는 아기스의 이상을 말해준 그의 아내와 철학교사인 스파이로스의 영향을 받았다. 아기스와 클레오메네스가 시도했던 모든 개혁은 스토아철학과 일치했다. 즉, 채무의 말소, 토지의 분배와 시민 상호간의 평등보장, 가치가 있는 사람을 포함함으로써 시민단을 증대시키는 것, 이전의 소박한 생활방식을 재도입하는 것 등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을 뒷받침 하려면 왕권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클레오메네스의 개혁: 감독관 중 네명을 살해하고 한 명은 추방하여 스스로 유일한 독재자 혹은 '참주'가 되었다. 그는 '파트로노모이'라는 일단의 행정관을 임명하였고 모든 토지는 공유가 될 것이며, 부채는 탕감되고 외국인은 심사 후에 시민권을 부여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토지는 4천 필지로 나누어 분배되었고, 페리오이코이 중에서 적합한 자를 뽑아 시민단을 확충하여 4천명의 중방보병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정복욕은 BC222년 셀라시아 전투의 패배로 이어졌고 그는 자살한다. 안티고노스가 스파르타를 장악하자 그의 개혁은 무산된다.
⊙ 나비스: 대부분 모든이들이 그를 잔인하고 극도로 무도한 악당으로, 그리고 참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악행과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성취했다.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를 해방시켰고, 자신이 취한 자금이 국가 공용으로 쓰일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아마도 공동식사비를 국가에서 부담하여 이를 분명히 부활시켰을 것이다.
⊙ 종언: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의 쇠락과 같이 하여 펠로폰네소스 내외의 모든 국가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엄격한 훈련의 틀에서 나오게 되자 새로운 환경에서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론
책을 읽는 동안에 저자인 험프리 미첼은 지금의 기준으로서도 상당한 전대의 평가이지만 스파르타의 존속 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가까운 후대에 기록된 여러 견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인데 아마도 이 책 통털어 가장 많이 반박당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를 바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의 접근을 한 점이 상당히 신선했다. 특히 헤일로타이의 탄압에 대한 과장된 시각
P 90
이라든지 연례적전쟁선포의 일부의 과장성에 대한 설명
P 87
등은 기존 거의 고정 관념화된 스파르타의 행위 대표적인 반박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역시 스파르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엄격하고 통제적인 생활 규칙에 대해서 가장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헤일로타이라는 잠재적 반발 세력이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헤일로타이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새롭게 깨달았다. 전쟁시에도 같이 참전했음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재산상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이는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는 다소 새로운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바로 정치체제 이다. 우선 왕이 2명이라는 점에서부터 생소하였고 시민에 의해서 선출된 감독관이 강력하게 왕권을 견제한다는 점은 참으로 독특한 정치 체제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단히 복잡한 정치 관계인데, 상,하원이라 할 수 있는 장로회, 민회 그리고 왕 상호간의 견제, 왕과 감독관과의 견제 등을 고려하자면 참으로 복잡한 체제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체제 하에서 제대로 정치가 될 수 있나하고 의아해 한 점도 있다. 그러나 결국 대단히 잘 유지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과연 안으로 내부의 적을 만들어 놓고 그들만의 문화에 갇혀 버린 스파르타인들을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스파르타의 그 강력한 군국주의적 성격과 강렬함 자체가 매력이고 그들의 슬로건처럼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기쁘고 아름답다'라는 멋있는 문구에 대한 칭송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신분적 독점성
당연히 시민권에 대한 설명이다. 오로지 전투에 매진하는 그들을 위해 먹여 살리는 노예들의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도 궁금하다.
이 그렇게 중요했는지 궁금하다. 역사에 있어서 만약이란 가정이 없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만약에 메세니아 지방의 선주민들과 융합하여 회유책을 구사하고 다분히 개방적 정책을 취했다면 좀더 다른 쪽으로 강건하게 발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더욱이 국가에 대해서 맹목적인 충성으로 인해서 한 개인의 일평생을 본다면 6살부터 55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지는 동안 개인의 자아발전에 대한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비율로 열세인 '동등자' 대 제압 대상인 헤일로타이의 비가 상당한 차이가 있을 지라도 결론은 역시 자신들만의 틀에 갇혀 개인이 자아발전의 길이 차단되고 더 나아가 이 '틀'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붕괴에 이르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생각할 점이 있다고 본다.
참고서적
1.험프리 미첼, 「스파르타」,2000, 신서원
2. 문석홍,「서양사 개론」,1998 삼영사
3. 조경래, 「서양사 입문」,1997 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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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30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8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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