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예술을 위한 예술
2. 사회주의
3. 사회적 책임
2. 사회주의
3. 사회적 책임
본문내용
느끼는 체 할 때이다. 이것은 곧 불성실이다(p. 241, 231). 이럴 경우 예술가는 다른 예술작품들을 모방할 뿐이거나 아니면 충격과 자극을 주려고 할뿐이다(제11장). 두 번째 것은 지각자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서 상호소통이 수행되지 않는 경우이다(제10장). 톨스토이 자신이 이 조항의 정확한 성격을 제대로 전달해 주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어떤 때는 한 작품이 그 호소력이 기껏해야 어떤 제한된 집단에 한정된다 하더라도 완전히 사적(私的)일 수는 없으며 또한 전혀 예술이 못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가, 다른 때는 한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예술이 되나 그것이 대부분의 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면 좋은 예술 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예컨대 그는 어떤 예술작품들이 '매우 좋으나 이해하기가 퍽 힘들다'는 변명에 반대한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물에 관해 그것이 매우 좋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p. 223). "예술은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이 즐겨 말하듯이 그것이 매우 좋다는 것 때문만으로 대중들에게 이해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예술이……매우 나쁜 예술이라는 결론을, 심지어는 전혀 예술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pp. 226∼227). (그래서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진정한 예술에는 설명하거나 해설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비평가와 비평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p. 242).
그렇다면 작품이 모호할 때, 즉 그것이 담고 있는 감정들이 너무 배타적이고 너무 불건전하고 하나의 사회계급에만 국한될 때, 상호소통은 실패한다. 톨스토이는 현시대 예술의 주요 주제들은 '영예, 애국심, 그리고 애욕'(p. 195)―또는 자부심, 성욕, 그리고 삶의 권태로움(p. 200)―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당신의 삶의 양식에 의해 도착적 심리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건강한 농부는 그런 감정들을 나누어 가질 수 없을 것이다(pp. 223, 196 참조).
어떤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앞에서 예술가 사이비 예술간의 구분에서부터 예술적 좋음의 판단에까지 거쳐왔다. 그것의 내용과 무관하게 좋은 예술을 판정하기 위한 자신의 기준을 명백하게 규정하면서 톨스토이는 하나의 양적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감염이 강렬하면 할수록 그 예술은 예술로서 더 훌륭하다"(p. 275)―여기에서 그는 감정의 강도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는 현대 음악과 시의 배타성에 관한 그의 논의를 통해 두 번째의 양적 판단기준, 즉 작품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효나 범위를 빈번하게 전제한다. 위대한 예술은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p. 225). 그러므로 베토벤의 라단조 교향곡(제9번)은 '좋은 예술작품이 아니다'(p. 295).
그러나 톨스토이는, 순전한 양적 판단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타고 있는지 모르고서 어떤 불을 좋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단지 그것이 감정을 환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좋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적 좋음에 대한 궁근적이고 피할 수 없는 판단은 어떤 감정들이 가질 만하고 어떤 감정들이 해로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정한 기준 위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이다. 여기에 톨스토이 자신의 종교관이 전제되어 있다.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사회 내에 전체 사회에 공통적인 선악에 대한 하나의 종교적 감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감정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이 종교적 관념이다"(pp. 177∼178). 한 특정 사회의 좋은 예술을 그 시대의 종교에 의해 인정된 최고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p. 179). 물론 일부 타락한 계층의 사람들은 그 종교를 공유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예술이란 단지 쾌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pp. 182∼183). 그러나 종교적 통찰이나 윤리적 지각의 진보적 첨병이 항상 존재하는 바(pp. 278∼279),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곧 예술의 기능이다. 우리 시대에서 최고의 종교감은 신을 아버지로 하는 전 인류의 형제관계에 대한 감각이다(제16장, pp. 281∼282, 285를 보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서 좋은 예술이란 (질적으로 말하자면) 이 감정을 다음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로써 소통케 하는 것이다. 첫째, 직접적으로는 기독교적 감정들을 환기시킴으로써이고(『레미제라블』,『크리스마스 캐롤』,『톰 아저씨 오두막』), 둘째, 간접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간경험들을 다루고 그럼으로써 인간들이 함께 느낄 수 있고 그들의 인간의 형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정서적 영역을 확장시킴으로써이다(pp. 288∼290)―『동키호테』,『데이비드 카퍼필드』, 몰리에르(Moli re)의 희곡들.
이 요구는 절박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예술이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그것에 드는 사회적 부담이 정당화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예술은 필수불가결하다. 그것은 "완전을 향한 인류운동"의 한 수단이기 때문이다(p. 278). "예술의 임무는 막중하다"(p. 331). 왜냐하면 오로지 그것의 도움에 의해서만 현재 사회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경찰, 법정, 전쟁, 그리고 폭력 등의 거대한 장치를 사랑과 신뢰가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톨스토이의 비폭력의 이상이 성취될 수 있다(p. 331). 어쨌든 중립이란 없다. 모든 인간들을 함께 결속시키지 않는 예술은 필연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으며(제17장), 후원자와 찬탄자들을 도착증 환자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면서 이에 비례해서 자신의 종복들―예컨대 저 조그마한 발레리나들―의 삶을 계속해서 곡예로 만들고, 결국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성을 끊임없이 부채질하는 애국심, 계급적 자부심, 관능, 그리고 미신 등의 저파괴적 감정들(pp. 305∼306)을 강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품이 모호할 때, 즉 그것이 담고 있는 감정들이 너무 배타적이고 너무 불건전하고 하나의 사회계급에만 국한될 때, 상호소통은 실패한다. 톨스토이는 현시대 예술의 주요 주제들은 '영예, 애국심, 그리고 애욕'(p. 195)―또는 자부심, 성욕, 그리고 삶의 권태로움(p. 200)―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당신의 삶의 양식에 의해 도착적 심리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건강한 농부는 그런 감정들을 나누어 가질 수 없을 것이다(pp. 223, 196 참조).
어떤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앞에서 예술가 사이비 예술간의 구분에서부터 예술적 좋음의 판단에까지 거쳐왔다. 그것의 내용과 무관하게 좋은 예술을 판정하기 위한 자신의 기준을 명백하게 규정하면서 톨스토이는 하나의 양적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감염이 강렬하면 할수록 그 예술은 예술로서 더 훌륭하다"(p. 275)―여기에서 그는 감정의 강도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는 현대 음악과 시의 배타성에 관한 그의 논의를 통해 두 번째의 양적 판단기준, 즉 작품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효나 범위를 빈번하게 전제한다. 위대한 예술은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p. 225). 그러므로 베토벤의 라단조 교향곡(제9번)은 '좋은 예술작품이 아니다'(p. 295).
그러나 톨스토이는, 순전한 양적 판단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타고 있는지 모르고서 어떤 불을 좋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단지 그것이 감정을 환기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좋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술적 좋음에 대한 궁근적이고 피할 수 없는 판단은 어떤 감정들이 가질 만하고 어떤 감정들이 해로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진정한 기준 위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이다. 여기에 톨스토이 자신의 종교관이 전제되어 있다.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사회 내에 전체 사회에 공통적인 선악에 대한 하나의 종교적 감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에 의해 전달되는 감정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이 종교적 관념이다"(pp. 177∼178). 한 특정 사회의 좋은 예술을 그 시대의 종교에 의해 인정된 최고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p. 179). 물론 일부 타락한 계층의 사람들은 그 종교를 공유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들에게 예술이란 단지 쾌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pp. 182∼183). 그러나 종교적 통찰이나 윤리적 지각의 진보적 첨병이 항상 존재하는 바(pp. 278∼279),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곧 예술의 기능이다. 우리 시대에서 최고의 종교감은 신을 아버지로 하는 전 인류의 형제관계에 대한 감각이다(제16장, pp. 281∼282, 285를 보라).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서 좋은 예술이란 (질적으로 말하자면) 이 감정을 다음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로써 소통케 하는 것이다. 첫째, 직접적으로는 기독교적 감정들을 환기시킴으로써이고(『레미제라블』,『크리스마스 캐롤』,『톰 아저씨 오두막』), 둘째, 간접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간경험들을 다루고 그럼으로써 인간들이 함께 느낄 수 있고 그들의 인간의 형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증진시킬 수 있는 정서적 영역을 확장시킴으로써이다(pp. 288∼290)―『동키호테』,『데이비드 카퍼필드』, 몰리에르(Moli re)의 희곡들.
이 요구는 절박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예술이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그것에 드는 사회적 부담이 정당화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예술은 필수불가결하다. 그것은 "완전을 향한 인류운동"의 한 수단이기 때문이다(p. 278). "예술의 임무는 막중하다"(p. 331). 왜냐하면 오로지 그것의 도움에 의해서만 현재 사회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경찰, 법정, 전쟁, 그리고 폭력 등의 거대한 장치를 사랑과 신뢰가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톨스토이의 비폭력의 이상이 성취될 수 있다(p. 331). 어쨌든 중립이란 없다. 모든 인간들을 함께 결속시키지 않는 예술은 필연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떼어놓으며(제17장), 후원자와 찬탄자들을 도착증 환자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면서 이에 비례해서 자신의 종복들―예컨대 저 조그마한 발레리나들―의 삶을 계속해서 곡예로 만들고, 결국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성을 끊임없이 부채질하는 애국심, 계급적 자부심, 관능, 그리고 미신 등의 저파괴적 감정들(pp. 305∼306)을 강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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