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변화-탈아론이 나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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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성장배경 및 서양문명과의 접촉

Ⅲ.문명론(文明論)

Ⅳ.탈아론(脫亞論)

Ⅴ.동아시아 정세

Ⅵ.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倉具視(1825-83), 오오쿠보 토시미치 大久保利通(1830-78), 이토오 히로부미 伊藤博文(1841-1909) 등에 의한 해외 시찰
의 파견으로 서양의 개화를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다. 그리고일본 부강의 실질을 동남아시아의자원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후 후쿠자와는 10년쯤 후(1882년 12월 11일) 구미제국을 체류하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동남아사아 지역)를 실제로 보고 그는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인도, 중국의 토인 등을 다스리는 영국인에게 배울 뿐 아니라동양의 권력을 우리가 혼자 장악 할것이라고 포착한다. 이로부터 2년후 1884년 6월 26일부 런던발신(日原昌造)으로「일본은 동양국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시사신보」논설(11월13일부)을 게재한다. 청불전쟁(1883-85)의 귀추가 확실해진 1885년 3월 16일부「시사신보」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을 게재한다.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렸다가 함께 아시아를 일으키는 유예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대오를 떠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고 , 저 중국조선과 교제하는 법도 이웃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을 봐 줄 필요도 없이 바로 서양인이 그것과 교제하는 식에 따라 처리하여야만 할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청일전쟁마저 승리한다. 이러한 일본 근대의 동아시아 인식은 분명히 산업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유럽의 그것(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을 계승하였던 것이다.
Ⅵ.맺음말
도쿠가와 말기 세 차례의 여행을 통하여 일찍이 서구문명을 접할 수 있었던 후쿠자와는 구미제국의 강성함과 국제정세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의 동아시아와 일본의 지위를 간파할 수 있었다. 그는 서세동점이라는 위기적 상황에서 일본이 독립을 보존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문명, 특히 그 문명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독립정신’과 ‘과학’을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주체성을 높이 평가하고 민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민권론(一身獨立)은 서구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독립인격체로서의 권리보장과 인권신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국권론(一國獨立)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민권을 강조했고, 따라서 개인의 주체성은 항상 국가라는 공동체 속에 매몰되었다.
후쿠자와의 최종목표는 일본이 국가적 독립을 보존하고 부국강병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일본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문명개화를 추구하는 한편, 동시에 관민조화를 확립할 것을 제창했다. 즉 서세동점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유보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에게서 문명개화나 또한 관민조화는 독립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현실주의자이고 실리주의자였던 후쿠자와의 한국관도 이러한 틀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는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강조했고, 또한 이를 위하여 조선의 개화파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자원하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행동 뒤에는 감추어진 그의 목적은 일본의 조선 지배였다. 1885년 그는『지지신보』에 “조선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라는 글을 싣고, 조선정부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민을 위해서 조선은 문명국에 점령당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역설하면서, “타국정부에 의해서 멸망할 경우 망국민이 되는 것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전혀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낳은 어려운 상황과 내외의 탐욕 속에서 죽어 가는 것보다 오히려 강대한 문명국의 보호를 받아 어떻게 해서라도 생명과 사유재산이라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강조했다. 개화파와의 연대를 주장하면서도 조선의 자주적 개화에는 기대를 걸지 않고, 실제로는 문명국의 지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문명의 이름으로 침략을 긍정하고 있고, 그 속에 조선은 스스로 문명개화를 이룰 수 없다는 멸시감이 깔려 있었다. 개화파에 대한 후쿠자와의 원조도 결국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조선에 대한 후쿠자와의 입장은 무관심에서 연대의 대상으로, 그리고 침략과 지배의 대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상황적인 것이었을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독립보존과 부국강병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목표에 조선이 어떠한 지위에 있느냐에 따라 그의 논리가 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반평생을 통해서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일본의 독립보전과 부국강병, 그리고 대외팽창이었다. 문명, 민권, 국회개설 등 이 모든 것은 결국 일본의 독립보전과 부국강병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후쿠자와는 일본의 국가주의와 팽창주의의 원형이었고, 그의 문명론은 이를 보강하고 동시에 위장하는 전략적인 수단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을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문명론의 변질(수정)된 침략주의(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하려는 일종의 방패막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후쿠자와 사상의 최대 결함)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 사후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사상(특히 탈아론)을 어떻게 위치 지울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그의 사상이 존재하는 한, 일본에서 최고의 사상으로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일본이 근대적인 야심을 갖고 대국 만들기를 하는 한 끊임없는 숙제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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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연구 文明思想, 임종원, 제이앤씨,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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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2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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