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 론.
본 론.
1. 일본인의 종교
1) 중층 신앙
2) 무종교성
3) 종교와 의례
2. 일상에서의 자연종교
1) 히나마츠리
2) 엔기모노
3. 대중문화에서의 자연종교
1) 애니메이션 - 원령공주
2) 애니메이션 -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
3) 음양사 - 만화, 영화, 소설
결 론.
본 론.
1. 일본인의 종교
1) 중층 신앙
2) 무종교성
3) 종교와 의례
2. 일상에서의 자연종교
1) 히나마츠리
2) 엔기모노
3. 대중문화에서의 자연종교
1) 애니메이션 - 원령공주
2) 애니메이션 -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
3) 음양사 - 만화, 영화, 소설
결 론.
본문내용
다. 종이인형 시키가미의 모습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본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마법 도장을 훔쳐간 용 하쿠를 잡기 위해 수없이 밀어닥쳤던 흰 종이새떼들이 바로 종이인형 시키가미다. 사람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이 시키가미는 <센과 치히로…>에서도 보듯이, 술력으로 날려보내 조종할 수 있으며, 술법이 끝난 후에는 종이로 되돌아가버리는 특징이 있다.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특징은 그가 요괴나 악령을 대할 때의 주술이 지극히 합리적 대화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음양사"라는 것 자체가 귀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무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기도 하다. 아베노 세이메이도 주술로 요괴를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한을 위로하고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더는 인간 세계를 어지럽히지 않고 편안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한다. 결국 음양사는 세상의 이치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즉 사람은 사람의 자리에, 요괴들은 요괴들의 자리에서,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서로의 영역과 일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들이 천문과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 즉 음양오행도를 깨치고 있다는 것도 이런 그들의 역할과 상통한다.
세이메이는 이렇게 말한다. "악령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공경이 아니라 이해"라고. 아베노 세이메이와 친구 히로마사는 귀신을 추모하는 시를 지어 달래거나 그의 능력이나 슬픔을 인정해주는 다정한 말을 해주고,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수달 귀신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물고 돌아가게 해주는 등, 인간이 가진 감정을 귀신도 가졌다는 전제 아래 행동한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아픔과 한에 공감해줌으로써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귀신과 대화하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보며 말도 안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있어 아베노 세이메이는 자신과 똑같이 자연 혹은 정령, 귀신과 교감하는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미신적인 인물이 나오는 대중매체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대중매체에 대한 공감은 그러한 매체에 대한 수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베노 세이메이를 다룬 여러 대중매체가 많은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결 론.
일본의 자연종교의 의식적 근간은 평범 지향성이다. 즉, 사계절, 아침/저녁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범한 행복을 기원하고 동시에 평범한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신을 섬기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의 대상조차 일상생활에 밀착된 존재로 한정시켰으며 교단종교에서 보이는 강한 초월성을 가진 신을 최소한 일상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통처럼 변해버린 그들의 오묘한 종교성은 손쉽게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문화가 종교를 흡수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먼저든지간에, 양자는 쉽게 결합했다. 예를 들어,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에서 왜 일본인들이 충격을 받았겠는가? 그들에게 '너구리' 는 일종의 카미 즉 신이다. 그러한 신이 인간의 산물에 의해 추방당하는 모습은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던 생활의 정신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절망감은 일상 생활의 위협으로 이어져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다. 어쨌든, 이렇게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된 자연종교와 대중문화는 자연종교와 일상생활 간에 이뤄지는 긴밀한 관계의 연장선 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일상과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종교 안의 일본인이기에 교단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경우가 더 많은 한국인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특징은 그가 요괴나 악령을 대할 때의 주술이 지극히 합리적 대화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음양사"라는 것 자체가 귀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무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기도 하다. 아베노 세이메이도 주술로 요괴를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한을 위로하고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더는 인간 세계를 어지럽히지 않고 편안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한다. 결국 음양사는 세상의 이치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즉 사람은 사람의 자리에, 요괴들은 요괴들의 자리에서,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서로의 영역과 일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들이 천문과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 즉 음양오행도를 깨치고 있다는 것도 이런 그들의 역할과 상통한다.
세이메이는 이렇게 말한다. "악령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공경이 아니라 이해"라고. 아베노 세이메이와 친구 히로마사는 귀신을 추모하는 시를 지어 달래거나 그의 능력이나 슬픔을 인정해주는 다정한 말을 해주고,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수달 귀신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물고 돌아가게 해주는 등, 인간이 가진 감정을 귀신도 가졌다는 전제 아래 행동한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아픔과 한에 공감해줌으로써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귀신과 대화하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보며 말도 안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있어 아베노 세이메이는 자신과 똑같이 자연 혹은 정령, 귀신과 교감하는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미신적인 인물이 나오는 대중매체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대중매체에 대한 공감은 그러한 매체에 대한 수요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아베노 세이메이를 다룬 여러 대중매체가 많은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결 론.
일본의 자연종교의 의식적 근간은 평범 지향성이다. 즉, 사계절, 아침/저녁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범한 행복을 기원하고 동시에 평범한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신을 섬기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의 대상조차 일상생활에 밀착된 존재로 한정시켰으며 교단종교에서 보이는 강한 초월성을 가진 신을 최소한 일상에서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통처럼 변해버린 그들의 오묘한 종교성은 손쉽게 문화를 흡수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문화가 종교를 흡수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먼저든지간에, 양자는 쉽게 결합했다. 예를 들어,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에서 왜 일본인들이 충격을 받았겠는가? 그들에게 '너구리' 는 일종의 카미 즉 신이다. 그러한 신이 인간의 산물에 의해 추방당하는 모습은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던 생활의 정신적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절망감은 일상 생활의 위협으로 이어져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위기를 불러일으키다. 어쨌든, 이렇게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된 자연종교와 대중문화는 자연종교와 일상생활 간에 이뤄지는 긴밀한 관계의 연장선 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일상과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종교 안의 일본인이기에 교단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경우가 더 많은 한국인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