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존재학적 예술 철학에 관한 연구
-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 이론을 중심으로 -
2. 실존과 역사해석에 관한 연구
- K. 야스퍼스의 역사철학을 중심으로 -
3. 철학적 초월성의 실존적 해석
4. 마르크스의 도덕관 연구
5. 의식-, 실존-, 존재범주로서 공간시간론에 관한 연구
- 칸트, 하이덱거, 하르트만을 중심으로 -
6.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와 세계
7. 아도르노에 있어서 예술의 자율성 연구
-부정성의 유토피아라는 관점으로-
-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 이론을 중심으로 -
2. 실존과 역사해석에 관한 연구
- K. 야스퍼스의 역사철학을 중심으로 -
3. 철학적 초월성의 실존적 해석
4. 마르크스의 도덕관 연구
5. 의식-, 실존-, 존재범주로서 공간시간론에 관한 연구
- 칸트, 하이덱거, 하르트만을 중심으로 -
6.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언어와 세계
7. 아도르노에 있어서 예술의 자율성 연구
-부정성의 유토피아라는 관점으로-
본문내용
. 따라서 그림언어를 분석하면 세계는 사물들이 논리적 형식에 따라 배열된 사실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림언어는 사실세계만을 그릴 수 있는 한계를 갖는 언어이다. 사실을 그리는 그림언어는 과학의 언어이다. 과학의 언어는 사실이 아닌 자아, 세계 전체, 그리고 윤리의 문제를 그릴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사실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사실을 가능하게 조건이다. 즉 이것들은 사실세계 안에 있어서 사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실세계의 한계를 변경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림언어로써는 이러한 세계의 한계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한다.
한계를 가진 언어에서 철학은 침묵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논리 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삶의 문제들을 일상언어에서 보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하는 것들의 배경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일상언어를 철학의 대상으로 하는『철학적 탐구』에서 그가 규정하는 세계는 삶의 세계이다. 일상언어는 예술, 종교, 철학, 윤리의 문제들을 포괄하는 일상적인 삶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는데 배겅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 문제들을 일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결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식 조차도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흐름(맥락) 속에서 삶을 배경으로 하여 확신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즉 우리가 함께 사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는 언어로써 가능하며 언어는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일상언어는 믿고 사는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 동시에 믿고 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의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바로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믿음은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7. 아도르노에 있어서 예술의 자율성 연구
-부정성의 유토피아라는 관점으로-
아도르노는 예술이 단지 사회적 상황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마르크스주의 예술이론에 반기를 들어 예술에 대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진정한 예술은 사회에 대한 초월적이어야 하고 부정적이어야 한다는 자율적 예술론을 폈다. 만일 예술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토대'에 의해 규정되는 이데올로기의 공식 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예술의 부정적 비판적 기능은 거세되고 개인을 환경에 순응케 하거나 항복케 만드는 구실로 왜소화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예술은 공산주의와 대중문화현상에 휘말려 당의 선전도구가 되거나 대중을 파시즘의 밥이 되도록 만드는 수동성과 순응성 형성을 위한 대중조작기술로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예술응 위한 예술'이란 미명 아래 현실에서 자연으로 도피하거나. 회고나 감상으로 빠지는 순응주의예술응 옹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예술이야말로 대중에게 무력감을 심어주고 힘에의 굴복을 권장하는 결과로 유도되어 궁극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목적에로 대중을 동원하는 조작기술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총체적으로 사물화된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예술의 자율성(Autonomie)이 확고한 '부정성의 유토피아'라는 논리 위에 서있는 아도르노의 사회철학적 예술론을 통해 정초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이란 '변증법적 비일치성'에 입각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자세 때문에 부르조아미학에서처럼 원래적으로 주어진 예술의 절대적 본질로서의 자율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정을 인식수단으로 하는 창조적 인식에의 길을 가능케 하는 '예술가의 자발성(Spontameit?t)을 내포한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부정의 변증법을 가능케 하는, 즉 부정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이 예술적 자발성이며 자율성'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의 철학, 사회학, 미학이론들이 폐쇄된 이론 대신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둔 비판적 자세로 일관하듯이, 그의 예술적 자율성 개념도 당대의 파시즘과 1, 2차 세계대전 등 비인간적인 시대상황에서의 부정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여기서 예술가의 자율성 혹은 자발성은 단순히 제도화된 사회규범에 대한 반항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자율성은 곧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 절대로 개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체 속에서 싹트는 것으로서 개체와 그의 자발성을 통하여 성취되는 예술적으로 객관적인 힘으로서, 그것은 답답하게 압박해 들어가는 사회적 상황을 인간다운 상황으로 고양시키는 힘이 예술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그것은 전체적 상황의 힘으며, 사회에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단순히 경직된 개인은 아닌 것이다.
결국 지배문화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심미적 인식의 형상으로 수행하는 데서 자율성과 자발성이 확보된다면, 개체란 보편을 통해 매개되고 그 반대 또한 그러하다. 즉 '한 편의 시는 그 사회의 입을 빌어 말하고 노래하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부정은 예술가 스스로의 존립기반마저 무화시키는 것이므로 사회적 사실로서의 현실에 대한 특정하면서도 확고한 부정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도르노의 의도이다.
아도르노의 의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Ⅱ에서는 아도르노에 앞선 전통미학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어떤 이유로 상실될 수 밖에 없었는지 추적한다. Ⅲ에서는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예술적 자율성의 내재적 기초로서의 예술작품에 관한 이론과 그 방법적 기초 및 철학적 기초를 살핀다. Ⅳ에서는 오늘날의 예술이 그 자명성을 상실하고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원인과 비자율적 예술들 및 그 배후로서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을 살펴본다. Ⅴ에서는 그처럼 총체적으로 사물화된 예술이 구제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미적 가상과 그 구체적 구제논리를 살필 것이다. Ⅵ에서는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 매개된 예술과 사회의 이율배반적 모습인 사물화와 유토피아로서의 '부정성의 유토피아'의 양상을 살펴보고 Ⅶ에서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에 대한 평가와 근원적 생산성으로서의 그의 예술이론의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한계를 가진 언어에서 철학은 침묵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논리 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삶의 문제들을 일상언어에서 보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하는 것들의 배경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일상언어를 철학의 대상으로 하는『철학적 탐구』에서 그가 규정하는 세계는 삶의 세계이다. 일상언어는 예술, 종교, 철학, 윤리의 문제들을 포괄하는 일상적인 삶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언어를 이해하는데 배겅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 문제들을 일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결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우리의 지식 조차도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흐름(맥락) 속에서 삶을 배경으로 하여 확신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즉 우리가 함께 사는 일상적인 삶의 세계는 언어로써 가능하며 언어는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일상언어는 믿고 사는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 동시에 믿고 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의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바로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믿음은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7. 아도르노에 있어서 예술의 자율성 연구
-부정성의 유토피아라는 관점으로-
아도르노는 예술이 단지 사회적 상황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마르크스주의 예술이론에 반기를 들어 예술에 대한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진정한 예술은 사회에 대한 초월적이어야 하고 부정적이어야 한다는 자율적 예술론을 폈다. 만일 예술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토대'에 의해 규정되는 이데올로기의 공식 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예술의 부정적 비판적 기능은 거세되고 개인을 환경에 순응케 하거나 항복케 만드는 구실로 왜소화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예술은 공산주의와 대중문화현상에 휘말려 당의 선전도구가 되거나 대중을 파시즘의 밥이 되도록 만드는 수동성과 순응성 형성을 위한 대중조작기술로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예술응 위한 예술'이란 미명 아래 현실에서 자연으로 도피하거나. 회고나 감상으로 빠지는 순응주의예술응 옹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예술이야말로 대중에게 무력감을 심어주고 힘에의 굴복을 권장하는 결과로 유도되어 궁극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목적에로 대중을 동원하는 조작기술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총체적으로 사물화된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예술의 자율성(Autonomie)이 확고한 '부정성의 유토피아'라는 논리 위에 서있는 아도르노의 사회철학적 예술론을 통해 정초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이란 '변증법적 비일치성'에 입각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자세 때문에 부르조아미학에서처럼 원래적으로 주어진 예술의 절대적 본질로서의 자율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정을 인식수단으로 하는 창조적 인식에의 길을 가능케 하는 '예술가의 자발성(Spontameit?t)을 내포한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부정의 변증법을 가능케 하는, 즉 부정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이 예술적 자발성이며 자율성'이다.
그러므로 아도르노의 철학, 사회학, 미학이론들이 폐쇄된 이론 대신에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둔 비판적 자세로 일관하듯이, 그의 예술적 자율성 개념도 당대의 파시즘과 1, 2차 세계대전 등 비인간적인 시대상황에서의 부정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여기서 예술가의 자율성 혹은 자발성은 단순히 제도화된 사회규범에 대한 반항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자율성은 곧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이 절대로 개체적인 것이 아니라, 개체 속에서 싹트는 것으로서 개체와 그의 자발성을 통하여 성취되는 예술적으로 객관적인 힘으로서, 그것은 답답하게 압박해 들어가는 사회적 상황을 인간다운 상황으로 고양시키는 힘이 예술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곧 그것은 전체적 상황의 힘으며, 사회에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단순히 경직된 개인은 아닌 것이다.
결국 지배문화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심미적 인식의 형상으로 수행하는 데서 자율성과 자발성이 확보된다면, 개체란 보편을 통해 매개되고 그 반대 또한 그러하다. 즉 '한 편의 시는 그 사회의 입을 빌어 말하고 노래하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부정은 예술가 스스로의 존립기반마저 무화시키는 것이므로 사회적 사실로서의 현실에 대한 특정하면서도 확고한 부정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도르노의 의도이다.
아도르노의 의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Ⅱ에서는 아도르노에 앞선 전통미학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어떤 이유로 상실될 수 밖에 없었는지 추적한다. Ⅲ에서는 아도르노가 주장하는 예술적 자율성의 내재적 기초로서의 예술작품에 관한 이론과 그 방법적 기초 및 철학적 기초를 살핀다. Ⅳ에서는 오늘날의 예술이 그 자명성을 상실하고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원인과 비자율적 예술들 및 그 배후로서의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을 살펴본다. Ⅴ에서는 그처럼 총체적으로 사물화된 예술이 구제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미적 가상과 그 구체적 구제논리를 살필 것이다. Ⅵ에서는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 매개된 예술과 사회의 이율배반적 모습인 사물화와 유토피아로서의 '부정성의 유토피아'의 양상을 살펴보고 Ⅶ에서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에 대한 평가와 근원적 생산성으로서의 그의 예술이론의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