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들과 연대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라틴어와 로마법 지식과 함께 절대왕권의 커다란 연합세력이 되었습니다.
7) 앎을 소홀히 하여 권력을 잃은 게르만의 무사계급
한편 처음에 왕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던 게르만의 무사들은 자유롭게 지배와 정복을 탐하여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한것이지요. 이것이 아득히 먼 봉건제의 시작입니다. 왕도 자기 몫의 땅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골 영토 전체에 대한 로마식의 주권은 없었습니다. 무사들은 싸우는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할줄 몰랐으므로 골의 농민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지대(地代)를 받았습니다. 안보와 생산의 행복한 분업이었던 셈이지요. 현물 지대를 납부하는 농민과 그 지대에 의해 유지되는 무사계급, 이것이 봉건제 사회의 중요한 두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귀족들을 왕권과 유리시키고, 중앙 권력으로부터 멀리 소외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리적인 거리가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그들이 앎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싸우는것만 좋아했던 무사 계급이었으므로 그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중세까지 귀족은 모두 문맹이었습니다.
왕권이 민중과 연합하고, 라틴어와 로마법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동안 게르만의 무사 귀족들은 권력과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습니다.
귀족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것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하게 되었을때 부터입니다. 귀족은 게르만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교회와 왕은 그들을 계속 무지하게 내버려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8) 귀족에게 앎의 재탈환을 호소한 불렝빌리에
여기서부터 불렝빌리에의 호소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권한을 박탈당한 귀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는것이 아닙니다. 그가 귀족에게 권유한것은 단지 앎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 고유의 기억의 되살림, 의식의 각성, 인식과 지식의 회복등입니다. 불렝빌리에가 우선 귀족들에게 권고한것은 《그대들이 박탈당한 - 아니 어쩌면 그대들이 한 번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 앎의 지위를 회복하지 않는한 그대들은 결코 권리를 되찾지 못할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어느 일정 시기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언제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하고 변덕스러운 허영, 그리고 바보스러운 자신감에서 유래하는 영원한 망각증을 불렝빌리에는 질타하고 있는것입니다. 귀족들의 자의식을 되찾고, 앎과 기억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귀족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는 새로이 역사에 눈길을 돌린것입니다. 앎의 직조(織造) 안에 다시 편입됨으로써만 귀족은 다시 세력을 되찾고, 역사의 주체로 떠오를수 있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9) 지배계급과 민중은 다른 계급
역사상 서구 사회는 지배 계급과 민중이 서로 다른 민족입니다. 유럽의 끄트머리에 있는 스페인의 왕정이 합스부르그에서 부르봉으로 넘어 갔다는 식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에서도 왕가와 귀족은 그 옛날의 정복자인 게르만 민족이고, 민중인 부르주아지는 토착의 켈트족입니다. 골 지방에 널리 흩어져 땅을 차지한 게르만 무사의 후예가 바로 17세기 당시의 귀족들입니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왕권이 꾸준히 키운 계급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 계급입니다. 왕권은 이 새로운 계급의 생생한 활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저항도 충분히 이용했습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반란등의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왕의 손이 있습니다.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권력이 왕권으로 이전되어 봉건제가 무너지고 절대왕정이 된것은 이처럼 왕권의 도움을 받은 저항들 덕분이라는것이 귀족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10) 앎으로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
역사의 초창기에 아무런 지분도 없던 이 계급이 서서히 부상하여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것은 순전히 앎, 그것에 의해서였습니다. 18세기말에 상업, 수공업, 자유업등의 여러 직업은 오로지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가 맡고 있었습니다. 군대나 교회, 행정부, 사법부의 중요한 직책은 물론 귀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 기구들의 10분의 9는 제3신분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789년의 대혁명으로 마침내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으로 부상했습니다.
맺는 말
푸코의 미시 권력 이론이 권력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킬수 있다는 비판자들의 우려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온 사회에 널리 퍼져있고, 세 사람만 모여도 거기에는 권력이 있으므로,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는 곧 권력의 관계이므로, 권력에 저항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비관주의로 귀결될수 있습니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그의 앎-권력 이론도 이미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출세지상주의나 신분상승의 열풍을 잠재우기는 커녕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이론적 근거가 될수도 있습니다.
철학에서 삶의 지표를 찾기 원하는 정통적 철학주의자들은 "그래, 대안이 무엇이냐?"고 다그치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 제시가 없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체적 일상 생활에서 매순간 행해지는 섬세한 권력의 양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 피지배의 거대한 두 덩어리로 나누는 마르크시즘의 둔탁한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현실에 대한 명석한 분석은 일단의 진실을 덮어둔채 도덕군자의 삶만을 제시하는 철학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지 않은, 혹은 권력에 물들지 않은 앎이란 없다고 푸코는 말하지만, 그러한 앎의 모습을 확인하는 우리의 앎은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앎을 소홀히 하여 권력을 잃은 게르만의 무사계급
한편 처음에 왕과 동등한 권한을 갖고 있던 게르만의 무사들은 자유롭게 지배와 정복을 탐하여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한것이지요. 이것이 아득히 먼 봉건제의 시작입니다. 왕도 자기 몫의 땅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골 영토 전체에 대한 로마식의 주권은 없었습니다. 무사들은 싸우는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할줄 몰랐으므로 골의 농민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해주고 그 대가로 지대(地代)를 받았습니다. 안보와 생산의 행복한 분업이었던 셈이지요. 현물 지대를 납부하는 농민과 그 지대에 의해 유지되는 무사계급, 이것이 봉건제 사회의 중요한 두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귀족들을 왕권과 유리시키고, 중앙 권력으로부터 멀리 소외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지리적인 거리가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그들이 앎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싸우는것만 좋아했던 무사 계급이었으므로 그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도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중세까지 귀족은 모두 문맹이었습니다.
왕권이 민중과 연합하고, 라틴어와 로마법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동안 게르만의 무사 귀족들은 권력과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습니다.
귀족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것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하게 되었을때 부터입니다. 귀족은 게르만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새로운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교회와 왕은 그들을 계속 무지하게 내버려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8) 귀족에게 앎의 재탈환을 호소한 불렝빌리에
여기서부터 불렝빌리에의 호소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권한을 박탈당한 귀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는것이 아닙니다. 그가 귀족에게 권유한것은 단지 앎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 고유의 기억의 되살림, 의식의 각성, 인식과 지식의 회복등입니다. 불렝빌리에가 우선 귀족들에게 권고한것은 《그대들이 박탈당한 - 아니 어쩌면 그대들이 한 번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 앎의 지위를 회복하지 않는한 그대들은 결코 권리를 되찾지 못할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어느 일정 시기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언제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하고 변덕스러운 허영, 그리고 바보스러운 자신감에서 유래하는 영원한 망각증을 불렝빌리에는 질타하고 있는것입니다. 귀족들의 자의식을 되찾고, 앎과 기억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귀족을 교육시키기 위해 그는 새로이 역사에 눈길을 돌린것입니다. 앎의 직조(織造) 안에 다시 편입됨으로써만 귀족은 다시 세력을 되찾고, 역사의 주체로 떠오를수 있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9) 지배계급과 민중은 다른 계급
역사상 서구 사회는 지배 계급과 민중이 서로 다른 민족입니다. 유럽의 끄트머리에 있는 스페인의 왕정이 합스부르그에서 부르봉으로 넘어 갔다는 식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역사에서도 왕가와 귀족은 그 옛날의 정복자인 게르만 민족이고, 민중인 부르주아지는 토착의 켈트족입니다. 골 지방에 널리 흩어져 땅을 차지한 게르만 무사의 후예가 바로 17세기 당시의 귀족들입니다.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왕권이 꾸준히 키운 계급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 계급입니다. 왕권은 이 새로운 계급의 생생한 활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저항도 충분히 이용했습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반란등의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왕의 손이 있습니다.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정치권력이 왕권으로 이전되어 봉건제가 무너지고 절대왕정이 된것은 이처럼 왕권의 도움을 받은 저항들 덕분이라는것이 귀족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10) 앎으로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
역사의 초창기에 아무런 지분도 없던 이 계급이 서서히 부상하여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것은 순전히 앎, 그것에 의해서였습니다. 18세기말에 상업, 수공업, 자유업등의 여러 직업은 오로지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가 맡고 있었습니다. 군대나 교회, 행정부, 사법부의 중요한 직책은 물론 귀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이 기구들의 10분의 9는 제3신분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789년의 대혁명으로 마침내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으로 부상했습니다.
맺는 말
푸코의 미시 권력 이론이 권력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킬수 있다는 비판자들의 우려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온 사회에 널리 퍼져있고, 세 사람만 모여도 거기에는 권력이 있으므로,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는 곧 권력의 관계이므로, 권력에 저항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비관주의로 귀결될수 있습니다. 앎이 곧 권력이라는 그의 앎-권력 이론도 이미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출세지상주의나 신분상승의 열풍을 잠재우기는 커녕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이론적 근거가 될수도 있습니다.
철학에서 삶의 지표를 찾기 원하는 정통적 철학주의자들은 "그래, 대안이 무엇이냐?"고 다그치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 제시가 없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체적 일상 생활에서 매순간 행해지는 섬세한 권력의 양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 피지배의 거대한 두 덩어리로 나누는 마르크시즘의 둔탁한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현실에 대한 명석한 분석은 일단의 진실을 덮어둔채 도덕군자의 삶만을 제시하는 철학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지 않은, 혹은 권력에 물들지 않은 앎이란 없다고 푸코는 말하지만, 그러한 앎의 모습을 확인하는 우리의 앎은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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