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마련해주는데, 이 중간 공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차가운 시선과 영화 매체의 자기 성찰 능력이 가시화된다. 오페라라는 매체가 음악극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대개는 성찰적인 숙고를 방해하고 모든 비판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의 동일화 모델로 기능하는 반면, - 이는 실제로 "Madama Butterfly"의 경우 빈번히 일어난 일이지만 - 영화는 그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거리와 소외 효과를 위한 가능성을 더욱 많이 허용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그 소외 효과 때문에 특히 높이 평가했던 북경 오페라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그 기술적 장점들을 이용하면서 비판적으로, 반어적으로 또는 풍자적으로 음악적 모델 그리고 시각적 환타지와 대결한다. 영화는 여기서 더욱 섬세한 매체로 나타난다. 크로넨버그는 더욱 세심하고 면밀하게 상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그 육체 언어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말해주는 주인공들의 확대된 얼굴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 인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 무비판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을 막는다. 영화 매체의 연출이 동일시를 방해하고 반어, 패러디로 작용해서 이야기의 실제적인 비극적 종말마저 오히려 희극적 또는 희비극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1968년 이후 버터플라이 때문에 이혼까지 하고 심지어는 간첩으로까지 변한 르네 갈리모어는 간첩 소송 사건 동안 오페라 극장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파리의 법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버터플라이가 남자라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들로써 만나게 되는 형무소의 차안에서 숭의 발가벗은 남성의 육체는 확대되어 폭로된다. 그의 마지막 고백인 셈이다. 여기서도 카메라는 숭의 나체에서 부드러운 여성적인 선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갈리모어는 시각적으로 마침내 숭의 "진짜 얼굴", 그의 성의 발가벗은 진실, 어쩌면 잠재된 것이었을지도 모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확인하게 되고 "내가 사랑했던 것은 완전한 거짓이었어. 나는 한 남자가 만들어낸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난 갈리모어의 마지막 변형은 결국 형무소에서 이루어진다. 그 곳의 무대 위에서 그는 "Madama Butterfly"를 직접 연출하고 연기하는 것이다. 기모노를 입고 오페라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그는 긴 독백을 한다.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은 정직한 고백을 하고 자신의 '성격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나는 한 남자가 창조해낸 가장 완전한 여인에 의해 사랑을 받았다...
우리는 아시아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다. 가치도 전혀 없는 낯선 악마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기모노와 청삼을 입은 날씬한 여성들을 우리는 본다.그들은 여자로서 완전해지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모든 벌들을 달게 받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강해져서 다시 부활하도록 태어났고 교육받았다. 이 견해는 내 삶이 되어 버렸다. 그게 나의 오류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나는 하나의 비젼을 - 한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남자를 위해서조차도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여자들이 오늘날에도 있다는 아시아에 관한 비젼을 갖고 있다.
'명예로운 죽음은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언제나 낫다.'
나는 마침내 그녀를 찾았다. 중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감옥에서 나는 그녀를 찾았다. 내 이름은 르네 갈리모어, 마담 버터플라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면도칼로 목줄을 끊고 동료죄수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죽어간다. 영화의 이 절정은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연극적인 방식으로 푸치니의 오페라와 그 아류 작품들이 심어놓은 마담 버터플라이의 판에 박힌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정점은 제국주의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해체가 완전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해체주의적인 마담 버터플라이가 특히 인상적인 까닭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남성과 여성,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항 대립 요소 혹은 양 극의 대비가 얼마나 극복하기 힘든 것인가를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갈리모어는 자신이 직접 하얗게 분장을 하고 마담 버터플라이로 변신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복종적이고 때로 비굴하지만 순진한 아시아 여인에 대해 가졌던 자신의 선입견이 착각이자 환상이었음을 폭로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는 모든 환멸과 실망을 겪고 난 후에도 여전히 지조를 지키는 마담 버터플라이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집착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꿈과 같은 환타지 상에 계속해서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마담 버터플라이는 남자인 그가 희망하는 여자의 이미지인 셈이다.
갈리모어의 죽음을 통해 나타나는 이 상반된 가치 또는 감정의 병존은 '식민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함축하는 마담 버터플라이가 이른바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세계화된 문화'에서도 무리 없이 이해되는 그야말로 세계화된 동양 여성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마담 버터플라이로 변신한 갈리모어가 자살을 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심지어는 마담 버터플라이가 갖는 문화적 인종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 상징이 내포하는 희생하는 여성 일반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불멸의 이미지로까지 찬양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M. Butterfly"는 한 편으로 '황인종'의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들을 지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리고 성적 정체성이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넘어서 이 영화는 이미지들 - 특히 영화의 움직이는 상들 - 역시 문화적 사회적 산물로서, 주어진 문화적 상상력의 틀(Imaginationsmuster)의 담지자로서 상호 매체적 관계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역사적, 사회적 담론과 대비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그 기술적 장점들을 이용하면서 비판적으로, 반어적으로 또는 풍자적으로 음악적 모델 그리고 시각적 환타지와 대결한다. 영화는 여기서 더욱 섬세한 매체로 나타난다. 크로넨버그는 더욱 세심하고 면밀하게 상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그 육체 언어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말해주는 주인공들의 확대된 얼굴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 인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 무비판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을 막는다. 영화 매체의 연출이 동일시를 방해하고 반어, 패러디로 작용해서 이야기의 실제적인 비극적 종말마저 오히려 희극적 또는 희비극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1968년 이후 버터플라이 때문에 이혼까지 하고 심지어는 간첩으로까지 변한 르네 갈리모어는 간첩 소송 사건 동안 오페라 극장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파리의 법정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버터플라이가 남자라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들로써 만나게 되는 형무소의 차안에서 숭의 발가벗은 남성의 육체는 확대되어 폭로된다. 그의 마지막 고백인 셈이다. 여기서도 카메라는 숭의 나체에서 부드러운 여성적인 선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갈리모어는 시각적으로 마침내 숭의 "진짜 얼굴", 그의 성의 발가벗은 진실, 어쩌면 잠재된 것이었을지도 모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확인하게 되고 "내가 사랑했던 것은 완전한 거짓이었어. 나는 한 남자가 만들어낸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난 갈리모어의 마지막 변형은 결국 형무소에서 이루어진다. 그 곳의 무대 위에서 그는 "Madama Butterfly"를 직접 연출하고 연기하는 것이다. 기모노를 입고 오페라 멜로디가 흐르는 가운데 그는 긴 독백을 한다.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은 정직한 고백을 하고 자신의 '성격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나는 한 남자가 창조해낸 가장 완전한 여인에 의해 사랑을 받았다...
우리는 아시아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다. 가치도 전혀 없는 낯선 악마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기모노와 청삼을 입은 날씬한 여성들을 우리는 본다.그들은 여자로서 완전해지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모든 벌들을 달게 받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강해져서 다시 부활하도록 태어났고 교육받았다. 이 견해는 내 삶이 되어 버렸다. 그게 나의 오류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나는 하나의 비젼을 - 한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남자를 위해서조차도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여자들이 오늘날에도 있다는 아시아에 관한 비젼을 갖고 있다.
'명예로운 죽음은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언제나 낫다.'
나는 마침내 그녀를 찾았다. 중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감옥에서 나는 그녀를 찾았다. 내 이름은 르네 갈리모어, 마담 버터플라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면도칼로 목줄을 끊고 동료죄수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죽어간다. 영화의 이 절정은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연극적인 방식으로 푸치니의 오페라와 그 아류 작품들이 심어놓은 마담 버터플라이의 판에 박힌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정점은 제국주의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해체가 완전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해체주의적인 마담 버터플라이가 특히 인상적인 까닭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이야말로 남성과 여성,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항 대립 요소 혹은 양 극의 대비가 얼마나 극복하기 힘든 것인가를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갈리모어는 자신이 직접 하얗게 분장을 하고 마담 버터플라이로 변신함으로써 한 편으로는 복종적이고 때로 비굴하지만 순진한 아시아 여인에 대해 가졌던 자신의 선입견이 착각이자 환상이었음을 폭로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는 모든 환멸과 실망을 겪고 난 후에도 여전히 지조를 지키는 마담 버터플라이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집착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꿈과 같은 환타지 상에 계속해서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마담 버터플라이는 남자인 그가 희망하는 여자의 이미지인 셈이다.
갈리모어의 죽음을 통해 나타나는 이 상반된 가치 또는 감정의 병존은 '식민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함축하는 마담 버터플라이가 이른바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세계화된 문화'에서도 무리 없이 이해되는 그야말로 세계화된 동양 여성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마담 버터플라이로 변신한 갈리모어가 자살을 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심지어는 마담 버터플라이가 갖는 문화적 인종적 한계를 뛰어넘어 이 상징이 내포하는 희생하는 여성 일반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불멸의 이미지로까지 찬양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M. Butterfly"는 한 편으로 '황인종'의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들을 지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리고 성적 정체성이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넘어서 이 영화는 이미지들 - 특히 영화의 움직이는 상들 - 역시 문화적 사회적 산물로서, 주어진 문화적 상상력의 틀(Imaginationsmuster)의 담지자로서 상호 매체적 관계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역사적, 사회적 담론과 대비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