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시작하는 글
Ⅱ. 하고 싶은 말
1. 여성 힙합 vs. 남성 힙합
2. "힙합은 남성의 전유물이다?"
3. '그녀들'의 목소리
4. 페미니즘과 흑인 여성 힙합
Ⅲ. 마치는 글
Ⅱ. 하고 싶은 말
1. 여성 힙합 vs. 남성 힙합
2. "힙합은 남성의 전유물이다?"
3. '그녀들'의 목소리
4. 페미니즘과 흑인 여성 힙합
Ⅲ. 마치는 글
본문내용
스타 비치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외모와 음악적 표현을 통해 기존 흑인 여성의 복종적이고 순종적 이미지를 거부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수동적 여성상에 대한 그들의 대안은, 소비주의에 중독된 게토의 갱스타 흑인 청년에 대한 무차별적 동경과 모방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흑인 여성의 권력 확보는 남성 중심의 힙합 문화에 대한 경배와 일방적 수용을 통해 가능하다는 또 다른 모순된 결과의 반복에 이르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흑인 여성 힙합 뮤지션들의 모호한 태도는 결국 '인종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동시에 동료 흑인 남성과 대립해야 하는' 그들의 모순적인 사회 문화적 지위로부터 기인한다. 즉,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는 흑인 여성과 남성들의 중요한 심정적, 문화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인종을 넘어선 여성간의 유대를 곤란케 만드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 유색 인종 여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들이 활발히 진행중이다. 더욱이 기존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도 폐쇄된 문을 개방하면서 미국 내 여성 운동은 점차 인종적 경계들을 넘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 뮤지션을 포함한 상당수의 흑인 여성들은 여전히 기존 페미니즘을 흑인 여성이나 흑인 공동체와의 구체적 연관성이 부재한, 단지 백인 여성만의 사회 운동으로 간주하는 게 현실이다. 결국 인종과 젠더의 문제를 배타적인 분석 범주로 취급해온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 이 이중적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노력에 보다 박차를 가하지 않는다면, 흑인을 비롯한 마이너리티 여성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여전히 좁아 보인다.
Ⅲ. 마치는 글
여전히 불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흑인 여성 힙합 뮤지션들의 작업이 오랜 기간 힙합 음악과 문화의 성장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해왔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될 것 같다. 그들은 남성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 작업에 때론 협조하고 때론 도전하면서 힙합 음악의 고정되고 편협한 관성들을 깨부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무엇보다, 남성 래퍼들의 성 차별주의에 대해 비판과 포용을 병행해온 그들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편으로 그들은 때론 의도적으로 때론 자연스럽게 인종주의와 젠더를 둘러싼 이슈들과 관련해 주류 사회의 지배 담론과 지속적으로 경합해왔다. 특히, 흑인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와 역사를 지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흑인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인종주의에 찌든 미국 대중 문화의 미학적 가치들을 전복하려 했던 기나긴 투쟁은 여성 힙합의 또 다른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잠시 언급한 인종적,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여성 힙합 전반의 새로운 변화는 물론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성과들을 공고히 하기 위한 여성 힙합 뮤지션들의 노력과 분투는 계속될 것이다. 이제 남성 힙합 팬들이 여성 힙합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제거하고 그들의 음악적 실천을 보다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그들은 훨씬 여유롭게 21세기 힙합 공동체의 또 다른 주체로 완전히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흑인여성힙합과 페미니즘을 연결시켜 페미니즘 비주류에 대한 관심으로 서론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이 글을 시작했다. 주류와 비주류라는 단어 선택이 결국에는 나와 타자를 나누는 근대적인 시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불편하긴 했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사용했다. 이는 나 자신도 결국에는 편협한 근대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삶이 힘들어진다. 나부터, 내 속에서부터 그 경계와 한계를 부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
페미니즘에 대한 흑인 여성 힙합 뮤지션들의 모호한 태도는 결국 '인종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동시에 동료 흑인 남성과 대립해야 하는' 그들의 모순적인 사회 문화적 지위로부터 기인한다. 즉,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는 흑인 여성과 남성들의 중요한 심정적, 문화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 인종을 넘어선 여성간의 유대를 곤란케 만드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 유색 인종 여성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들이 활발히 진행중이다. 더욱이 기존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도 폐쇄된 문을 개방하면서 미국 내 여성 운동은 점차 인종적 경계들을 넘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 뮤지션을 포함한 상당수의 흑인 여성들은 여전히 기존 페미니즘을 흑인 여성이나 흑인 공동체와의 구체적 연관성이 부재한, 단지 백인 여성만의 사회 운동으로 간주하는 게 현실이다. 결국 인종과 젠더의 문제를 배타적인 분석 범주로 취급해온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이 이 이중적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노력에 보다 박차를 가하지 않는다면, 흑인을 비롯한 마이너리티 여성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여전히 좁아 보인다.
Ⅲ. 마치는 글
여전히 불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흑인 여성 힙합 뮤지션들의 작업이 오랜 기간 힙합 음악과 문화의 성장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해왔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될 것 같다. 그들은 남성 힙합 뮤지션들의 음악 작업에 때론 협조하고 때론 도전하면서 힙합 음악의 고정되고 편협한 관성들을 깨부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무엇보다, 남성 래퍼들의 성 차별주의에 대해 비판과 포용을 병행해온 그들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편으로 그들은 때론 의도적으로 때론 자연스럽게 인종주의와 젠더를 둘러싼 이슈들과 관련해 주류 사회의 지배 담론과 지속적으로 경합해왔다. 특히, 흑인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와 역사를 지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흑인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인종주의에 찌든 미국 대중 문화의 미학적 가치들을 전복하려 했던 기나긴 투쟁은 여성 힙합의 또 다른 소중한 성과라 할 수 있겠다.
앞서 잠시 언급한 인종적,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여성 힙합 전반의 새로운 변화는 물론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성과들을 공고히 하기 위한 여성 힙합 뮤지션들의 노력과 분투는 계속될 것이다. 이제 남성 힙합 팬들이 여성 힙합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제거하고 그들의 음악적 실천을 보다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그들은 훨씬 여유롭게 21세기 힙합 공동체의 또 다른 주체로 완전히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흑인여성힙합과 페미니즘을 연결시켜 페미니즘 비주류에 대한 관심으로 서론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이 글을 시작했다. 주류와 비주류라는 단어 선택이 결국에는 나와 타자를 나누는 근대적인 시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불편하긴 했지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사용했다. 이는 나 자신도 결국에는 편협한 근대적인 사고에 물들어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삶이 힘들어진다. 나부터, 내 속에서부터 그 경계와 한계를 부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