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북한산성 축성의 배경
2. 북한산성 축성론
3. 북한산성 축성 반대론
4. 북한산성의 축성
5. 북한산성의 수비
2. 북한산성 축성론
3. 북한산성 축성 반대론
4. 북한산성의 축성
5. 북한산성의 수비
본문내용
감독하게 하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으니 처음부터 성역을 분담한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각기 맡은 부분에 있어서의 수선(修繕), 양곡(糧穀), 기계(器械), 수호(守護) 등의 책임을 담당하게 하십시오.」
라는 의견을 첨가하여 세부적인 대안책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동월 23일에 이르러 여러 대신이 모여 토의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판부사 이원명은 ‘삼군문으로 하여금 각각 분담하여 성내의 일을 경리하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했고 형조판서 이언강, 이조참판 윤지인(尹趾仁) 등이 그의 의견과 대개 같이 했으며, 우의정 조상우(趙相愚), 행병조판서 최석항은 ‘삼군문이 맡아서 담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정하여 성내의 일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주장하였고, 이조참의 이광좌는 ‘역의 일은 잠시 동안 삼군문으로 담당하게 하고, 따로이 주관인을 임명하여 전체를 감독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절충안을 제시하였다.이에 대해 숙종은 주관인을 정하기로 하고 그 인물로서 총융사 김중기가 어떠한가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은 이에 대해 난색을 표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북한산성이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장신(將臣)이 전관(專管)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군문이 감독하고 있는데, 총융청에서 주관하는 일을 알게 하면 삼군문과 총융청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어쩔 수 없이 숙종은 당분간 삼군문에 일을 일임하고 주관인은 차후로 미루었다.
그 후 숙종 38년(1712) 4월 숙종이 북한산성으로 행행하여 동장대에서 대신을 입시케 하였는데 이 때 성역과 행궁공역을 주관한 호조판서 김우항은 다시금 주관인의 책정과 아울러 북한산성내의 군읍(郡邑)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북한산성 부근에 있는 양주군의 4∼5면과 고양군의 1면을 이 성으로 옮겨서 1읍을 만들고 각 호(號)를 만들어 북한부사(北漢府使), 혹은 중흥부사(重興府使), 혹은 수비사(守備使)를 두어 그로 하여금 성내를 통찰하게 하면 모든 일이 보장될 것이며 이후 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도 또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제시하였고, 이에 대해 숙종은 ‘묘당에 명하여 의논해 정하도록 하겠다’고 하여 소극적인 반응을 나타냈다.그러나 이러한 김우항의 의견은 이루기가 어렵고 영구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어 채택되지 못했다. 그 해 8월에 이르러서 숙종이 대신과 비국 제신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서종태가 북성주관당상(北城主管堂上)을 임명할 것을 건의하면서 민진후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판부사 이유를 주관으로 하고 병조판서 조태채(趙泰采)를 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조태채가 비국(備局)의 낭관 1인과 서리, 사령 각 2인을 획급할 것을 청하여 이를 허락하였다.곧 이어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인 경리청을 두고 이에는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의 수호, 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 동문, 성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승려들을 북성에도 배치하였다. 숙종 37년(1711) 7월에는 북성주관당상인 호조판서 김우항이 건의하기를 ‘북한산성내에는 절이 중흥사 한 곳밖에 없으니 많은 절을 세워서 수비를 충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고, 그 방법으로서는 공명첩(空名帖) 1,000장을 만들어 주어 경비를 조달하게 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의정 서종태가 이 의견에 찬성을 표하고 숙종은 마침내 공명첩 1,000장을 발부하여 사찰 건립의 경비를 보충하게 했다. 또 숙종 38년 4월에 이르르면 김우항이 또다시 사찰 문제로 건의하였는데, 그는
「신이 전일에 품하여 공명첩을 얻어 승도를 모으고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 지금은 성내에 새로이 지은 절이 8개이고 중흥사와 합쳐 모두 9개의 절이 있어서 승도가 많이 모여드는데 이를 통치하는 사람이 스스로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 남한산성의 예에 의거하여 비국에 명하여 총섭(總攝)을 임명하여 두는 것이 어떠합니까.」
라고 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 그리하여 북성의 승려들을 통솔하는 총섭의 직제를 설치하게 되고 사찰도 모두 9개가 되었다. 숙종 41년(1715)에 이르러서 사찰이 1개 더 이루어져 모두 10개에 달했다.
한편 산성의 수비를 위해 정규군과 함께 승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이에 성내의 11사 2암자를 세우고 이 곳에서 거주하는 승려에게 어느 정도의 특전까지도 부여함으로써 각사에서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때문에 성내의 각사에서 승장(僧將) 11인, 수승(首僧) 11인을 임명하였으며 승병은 350명에 이르렀다. 용흥사와 태고사를 제외한 서암사 133칸, 용암사 87칸, 보국사 177칸, 보광사 71칸, 부왕사 111칸, 원각사 74칸, 국녕사 86칸, 상운사 133칸, 진국사 85칸, 봉성암 25칸, 원효암 10칸은 산성이 완공되면서 이와 같은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승병의 사용은 이미 선조 29년(1596) 정월 비변사의 제의에서 발로되었으며 숙종조에는 상당한 진척까지 있어 승군의 조직까지도 확정되었다. 즉 북한산성의 수비를 위한 승군의 조직으로는
「승대장(僧大將) 1명
중군(中軍), 좌 · 우부장(左右副將), 천총(千摠), 지파(地把), 별고감(別庫監) 각 1명
교련관(敎鍊官), 기패관(旗牌官), 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명
오기차지(五旗次知) 1명
도훈도(都訓導) 각 1명
사료군관(射料軍官) 10명, 서기(書記) 2명, 통인(通人) 2명, 고직(庫直) 3명, 책장무(冊掌務) 각 1명, 취수(吹手) 2명, 각 사(寺) 승장(僧將) 11명, 수승(首僧) 11명, 의승(儀僧) 350명」
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각도에서 1년에 여섯 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번상했다. 이와 함께 각사에는 품계를 주었는데 영조 5년(1729)의 품계를 보면 표<승장(僧將)의 품계와 법명>과 같다.
라는 의견을 첨가하여 세부적인 대안책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동월 23일에 이르러 여러 대신이 모여 토의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서 판부사 이원명은 ‘삼군문으로 하여금 각각 분담하여 성내의 일을 경리하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했고 형조판서 이언강, 이조참판 윤지인(尹趾仁) 등이 그의 의견과 대개 같이 했으며, 우의정 조상우(趙相愚), 행병조판서 최석항은 ‘삼군문이 맡아서 담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을 정하여 성내의 일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주장하였고, 이조참의 이광좌는 ‘역의 일은 잠시 동안 삼군문으로 담당하게 하고, 따로이 주관인을 임명하여 전체를 감독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절충안을 제시하였다.이에 대해 숙종은 주관인을 정하기로 하고 그 인물로서 총융사 김중기가 어떠한가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은 이에 대해 난색을 표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북한산성이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장신(將臣)이 전관(專管)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군문이 감독하고 있는데, 총융청에서 주관하는 일을 알게 하면 삼군문과 총융청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어쩔 수 없이 숙종은 당분간 삼군문에 일을 일임하고 주관인은 차후로 미루었다.
그 후 숙종 38년(1712) 4월 숙종이 북한산성으로 행행하여 동장대에서 대신을 입시케 하였는데 이 때 성역과 행궁공역을 주관한 호조판서 김우항은 다시금 주관인의 책정과 아울러 북한산성내의 군읍(郡邑)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는
「북한산성 부근에 있는 양주군의 4∼5면과 고양군의 1면을 이 성으로 옮겨서 1읍을 만들고 각 호(號)를 만들어 북한부사(北漢府使), 혹은 중흥부사(重興府使), 혹은 수비사(守備使)를 두어 그로 하여금 성내를 통찰하게 하면 모든 일이 보장될 것이며 이후 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도 또한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제시하였고, 이에 대해 숙종은 ‘묘당에 명하여 의논해 정하도록 하겠다’고 하여 소극적인 반응을 나타냈다.그러나 이러한 김우항의 의견은 이루기가 어렵고 영구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어 채택되지 못했다. 그 해 8월에 이르러서 숙종이 대신과 비국 제신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서종태가 북성주관당상(北城主管堂上)을 임명할 것을 건의하면서 민진후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판부사 이유를 주관으로 하고 병조판서 조태채(趙泰采)를 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조태채가 비국(備局)의 낭관 1인과 서리, 사령 각 2인을 획급할 것을 청하여 이를 허락하였다.곧 이어 10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산성의 주관부서인 경리청을 두고 이에는 도제조와 제조관을 두었다. 행궁의 수호, 관리는 관성장(管城將)이 맡았으며, 수성장병(守城將兵)으로는 대성문, 동문, 성문에 수문장 각 1인과 갑사둔(甲士屯), 점암둔(點岩屯)에 둔장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수첩군관(守堞軍官)은 266인, 별파진(別破陣) 200인, 아병(牙兵) 635인이 항상 거주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데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승려들을 북성에도 배치하였다. 숙종 37년(1711) 7월에는 북성주관당상인 호조판서 김우항이 건의하기를 ‘북한산성내에는 절이 중흥사 한 곳밖에 없으니 많은 절을 세워서 수비를 충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고, 그 방법으로서는 공명첩(空名帖) 1,000장을 만들어 주어 경비를 조달하게 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영의정 서종태가 이 의견에 찬성을 표하고 숙종은 마침내 공명첩 1,000장을 발부하여 사찰 건립의 경비를 보충하게 했다. 또 숙종 38년 4월에 이르르면 김우항이 또다시 사찰 문제로 건의하였는데, 그는
「신이 전일에 품하여 공명첩을 얻어 승도를 모으고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 지금은 성내에 새로이 지은 절이 8개이고 중흥사와 합쳐 모두 9개의 절이 있어서 승도가 많이 모여드는데 이를 통치하는 사람이 스스로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 남한산성의 예에 의거하여 비국에 명하여 총섭(總攝)을 임명하여 두는 것이 어떠합니까.」
라고 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 그리하여 북성의 승려들을 통솔하는 총섭의 직제를 설치하게 되고 사찰도 모두 9개가 되었다. 숙종 41년(1715)에 이르러서 사찰이 1개 더 이루어져 모두 10개에 달했다.
한편 산성의 수비를 위해 정규군과 함께 승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이에 성내의 11사 2암자를 세우고 이 곳에서 거주하는 승려에게 어느 정도의 특전까지도 부여함으로써 각사에서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때문에 성내의 각사에서 승장(僧將) 11인, 수승(首僧) 11인을 임명하였으며 승병은 350명에 이르렀다. 용흥사와 태고사를 제외한 서암사 133칸, 용암사 87칸, 보국사 177칸, 보광사 71칸, 부왕사 111칸, 원각사 74칸, 국녕사 86칸, 상운사 133칸, 진국사 85칸, 봉성암 25칸, 원효암 10칸은 산성이 완공되면서 이와 같은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승병의 사용은 이미 선조 29년(1596) 정월 비변사의 제의에서 발로되었으며 숙종조에는 상당한 진척까지 있어 승군의 조직까지도 확정되었다. 즉 북한산성의 수비를 위한 승군의 조직으로는
「승대장(僧大將) 1명
중군(中軍), 좌 · 우부장(左右副將), 천총(千摠), 지파(地把), 별고감(別庫監) 각 1명
교련관(敎鍊官), 기패관(旗牌官), 중군병방(中軍兵房) 각 2명
오기차지(五旗次知) 1명
도훈도(都訓導) 각 1명
사료군관(射料軍官) 10명, 서기(書記) 2명, 통인(通人) 2명, 고직(庫直) 3명, 책장무(冊掌務) 각 1명, 취수(吹手) 2명, 각 사(寺) 승장(僧將) 11명, 수승(首僧) 11명, 의승(儀僧) 350명」
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각도에서 1년에 여섯 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번상했다. 이와 함께 각사에는 품계를 주었는데 영조 5년(1729)의 품계를 보면 표<승장(僧將)의 품계와 법명>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