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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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발해의 정치적 발전
발해의 건국
발해의 발전(719-793)
ⅰ무왕(719-737) - 7세기 발해와 신라.당의 전쟁
ⅱ 문왕 (738-794) - 내부 정비와 국력의 신장
발해의 혼란(794-818) - 왕족.귀족들의 정치 투쟁
발해의 중흥(819-893)
발해의 멸망(926)
발해인의 광복 운동 및 활동

(2)발해의 사회
발해의 행정구역
발해의 관제

(3)발해의 경제

(4)발해의 문화

(5)발해의 대외관계
발해의 건국기
발해의 초기-중기
발해의 중기-말기
발해의 말기
신라와의 관계

본문내용

한 적이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발해는 귀족들의 정치 투쟁에 의하여, 무기력해져 버렸다. 발해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니 신라는 발해를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발해는 구원의 대상 중에 우선적으로 신라를 택했고, 신라 역시 동의한 사실이주목된다. 하지만 막상 요의 발해 침공 때 신라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나라 이사도의 반란때 무려 3만의 군사를 지원했던 신라는 구원은 커녕 요와 함께 발해를 공격하였다. 요사에는 회골, 신라 토번, 당항, 실위등이 거란에 군사적 지원을 해 주어 상을 주었다는 애기가 나온다. 하지만 신라는 후백제 세력에도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나라를 도왔다는 애기는 군사적 지원보다도 외교적인 차원에서 요를 지원했다고 생각한다. 발해 멸망 후, 신라 역시 멸망하여 두 나라는 대부분의 시기를 대립과 반목으로 보낸 역사로 전해진다.
신라와의 관계
신라는 발해와 경계가 되는 지역에 성을 쌓고 군사를 배치하여 발해의 침입을 경계했다. 건국 당시와는 달리 이 무렵 발해와 신라가 사신을 교환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발해에서는 신라도를 개척했다. 신라도는 동경용원부가 있는 책성에서 함경도에 있는 천정군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다. 이 길에 39개의 역이 있었다니 민간인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무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길은 고구려가 신라로 내려오던 통로였다.
신라는 통일을 이룩하고 내정이 안정된 뒤 일본을 얕보았다. 일본의 침구가 뜸해지기도 하였으나 신라는 일본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상황에서 일본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이런 처지에 발해의 사절이 먼저 오자 일본으로서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발해는 신라를 견제하고 당나라의 주의를 환기하려는 의도에서 일본과 능동적으로 우호를 맺고자 했다. 더욱이 발해는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키우고 있었다. 발해는 일본의 군사력에 의탁해 신라를 견제하는 무형의 수단으로 삼았다. 여기에 곁들여 물산 교류와 문화의 매개라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신라는 발해와 일본이 밀착한 사실을 알고 일본에 더욱 고압적으로 나왔다. 일본도 뻣뻣하게 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742년(경덕왕1) 일본 사신이 왔을 때 받아들이지 않았다. 743년에서 752년 사이에 두 나라는 국교를 단절했다. 이무렵 일본에서는 후지와라가 실권을 틀어쥐었다. 753년(경덕왕 12)에 일본 사절 일행이 다시 경주에 왔다. 경덕왕은 일본 사신이 거만하고 무례하다고 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 사신은 두 차례나 말도 붙여보지 못하였으니 자신들의 파견 목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수모를 겪은 일본은 신라를 향해 칼을 갈았다. 후지와라 정권은 신라 정벌을 계획하고 이번에는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사신은 발해에 가서 신라 정벌의 지원을 요청했다.
발해는 일본 사절의 귀로에 양승경을 딸려 보냈다. 양승경 일행은 일본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이때 발해의 대답은 미온적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신라 침입을 실행하기 위해 행군식을 만들고 3년 안에 배 500척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발해에 또 사절을 파견하였다. 762년 발해에 온 사신은 고마다이산(高麗大山)이었다. 이 사람은 고구려의 성을 가진 것으로 보아 고구려 유민으로 보인다. 고마다이산이 돌아와서 보고한 것은 합동작전의 거절이었다. 발해는 종전에 무관을 보내던 관례를 깨고 문관을 답례사로 보내 거절의 뜻을 보였다. 발해 사신은 왕신복(王新福)이라는 문관이었고 그 일행도 23명의 작은 규모였다.
이때의 왕래에서 합동작전의 불발에 따른 것인지 몇 가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고마다이산은 노심초사한 탓인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병이 들었고 겨우 일본 땅인 가가의 나루에 이르러 보고도 올리지 못하고 덜컥 죽었다.
황산복도 예전과는 달리 푸대접을 받았고 눈치를 살피며 지내야 했다. 발해 사절이 돌아올 때 일본에서는 낡은 배를 수리하여 내주었고 송사도 딸려 보내지 않았다. 뱃사람들만 태워 송사 노릇을 하게 하였다.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냉대를 한 것이다.
후지와라 정권은 실권을 쥐고 반대세력을 억누르는 한 방법으로 신라 침략을 계획하였지만, 발해는 굳이 신라와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발해는 결코 먼저 남의 나라를 공격한 적이 없다. 더욱이 문왕은 내치를 다지면서 전쟁을 도모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발해와의 합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곧이어 후지와라 정권이 실각함으로써 신라 침략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해와 일본이 이 사건만을 계기로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신들이 오고갔다. 다만 이후부터는 규정된 관례를 만들어 군사나 정치적 의미보다는 단순한 교류와 교역에 무게를 두었다.
발해는 국가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북방 정복활동을 벌여 영역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때에 세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면 동아시아는 또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신라는 뒤늦게나마 이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신라는 790년(원성왕 6)에 일길찬(一吉) 백어(伯魚)를 발해에 사신으로 보냈고 그 뒤 812년(헌덕왕 4)에는 급찬 승정(乘正)을 사신으로 보냈다. 여전히 일본과 밀착하고 있는 발해를 경계하여 우호를 다지려고 한 것인지 어떤지 그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또 사신들이 발해에 가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도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일길찬이나 급찬이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아치를 사신으로 보낸 사실만이 확인된다.
이 무렵 신라에서는 모반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몇 고비를 넘긴 뒤 원성왕이 어렵사리 왕위를 불법으로 탈취하였다. 원성왕의 정치 기반은 취약하고 불안했고 귀족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자주 모반을 꾀했다. 신라는 발해에 사신을 보내 귀족들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관계의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국내 정치기반을 안정시키는 길이었다.
신라는 일본과도 교류를 가지려고 노력하여 803년에는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일본도 발해만을 쳐다보지 않고 신라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세 나라는 당나라를 중심으로 작은 마찰과 갈등을 빗기도 하였으나 전쟁을 유발하는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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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02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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