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조경사-조경기사요약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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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조경사-조경기사요약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Ⅱ 중세의 조경문화

1. 중 국
① 북송(北宋)시대
② 남송(南宋)시대
③ 금(金)시대
④ 원(元)시대

2. 한 국
① 고려(高麗)시대

3. 일 본
① 평안(헤이안)시대 후기
② 겸창(가마꾸라 막부)시대

본문내용

이 꾸며지고 선종교가 융성해짐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경원이 나타났다.
가. 정토경원
정토사상에 입각한 사찰 정원으로 선종의 전파로 그 규모가 약간 축소되었다.
◆ 정유리사지원(淨瑠璃寺池園)
동, 남, 서쪽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사찰은 11세기에 창건되었고 아미타당(阿彌陀堂)은 1107년에 창건되었으며 1150년에 혜신승정은 당 앞에 못을 정비하고 경석을 세웠다. 그 후 조원의 명인이던 소납언법안이 누문(樓門)안과 못가에 경석을 세우고 북문 안쪽에 있는 종누(鐘樓) 아래편 배수로의 배석이나 3중탑 앞쪽의 배석도 함께 배치하였다. 원지는 고구마 모양의 중도가 있는 곡지 형태로서 지안천은 둔하고 변화가 적은 편이다. 다만 못의 서남각과 동쪽, 남쪽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고, 자연에는 경석이 세워져 있으며 동쪽의 3중탑 아래쪽과 서쪽의 아미타당 앞쪽에는 석등(石燈)이 배치되어 있다. 중도에는 변천사(弁天祠)가 있고 편백나무, 삼나무, 홍가시나무등이 우거져 있으며 섬의 가장자리에는 둥근돌을 깔아 해안의 풍경을 연출하였다.
◆ 칭명사지원(稱名寺池園)
요꼬하마시 뒷산에 있으며 1270년경 북조실시가 지었던 별장곁에 그의 아들 도움으로 이 절이 세워졌고 당시의 건축과 지원의 모습을 그린 "칭명사결계도"가 전해지고 있다. 지원은 인왕문과 금당 사이에 있으며 지형은 중도가 있는 곡지로서 지안선은 자연곡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중도의 북과 남에는 다리가 놓여 있어 통로로 이용되며 못가에는 단풍나무와 매화나무가 심어지고 경석이 배치되어 있다.
나. 선종경원
가마꾸라시대 중엽의 일본경원은 정토교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반면 선종사상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어 선종사원의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되고 그 가람배치는 경원의 양식에도 새로운 경향을 불러 일으켰다. 송에서 온 난계도룡이 1253년에 건장사를 개산(開山)하였는데 여기에는 송의 엄정한 사원의 제도가 옮겨져 가람배치의 기준이 정해졌다. 이것은 선종 배경의 전원(煎園)양식으로서 맨앞에는 총문이 있고 이어서 산문, 불전, 법당, 침당등이 일직상으로 배치된 정형적인 형식이다. 이처럼 사원의 앞뜰이 좁고 길며 정형적인 평면구성은 정토경원시대에는 없던것으로 전시대의 본당의 앞에 전개해 있던 풍경적인 원지가 본당 안쪽으로 후퇴하고 사찰의 사정원(私庭園)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특히 선종사원은 배후에 구릉을 짊어진 지형을 골라 절터를 정하였으므로 평지에 경원을 꾸몄던 전시대와는 달리 입체성이나 음형등의 요소가 곁들여진 조경기법을 발달시켰다.
정토경원의 양식은 이른바 종교적인 이상향을 지상에 직접 구현시키는것을 주제로 하였으며 사원의 경성(境城) 전체가 경원의 경관에 직접 관련을 가졌으나 선종사원에 있어서의 옥외 공간은 일상의 종교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갖는 장소로서 단독으로 계획되었다. 가마꾸라 막부시대의 대표적인 조경가로는 몽창소석(몽청국사)이 있는데 그는 당시 사상계의 제1인자로서 존경 받아 왔으며 상류 계급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명승으로 한떠 국사의 호칭도 받았다. 소석은 평안시대에 발전했던 정토사상의 토대위에 선종의 자연관을 강하게 덧붙여 표현(선종 정원의 창시자)했는데 서방사의 경우처럼 전시대에 있었던 사원경성을 선종사원으로 정비할때 정토경원의 형식은 조금씩 변모해 갔다.
※ 몽촌소석의 대표작
→ 영보사, 서천사, 혜림사, 서방사 지원, 청룡사정원, 등지원, 삼회원, 흡강사등
◆ 서천사경원(瑞泉寺景園)
1327년 몽창소석은 서쪽의 복토산을 객산, 북쪽의 천태산을 주산으로 하고 선종에 어울리는 승지인 금병산 중턱에 서천사를 창건하여 먼저 불전과 방장을 세워 불도를 닦았다. 이듬해에는 관음전을 짓고 경원을 완성했는데 뜰로부터 못에 걸치어 놓은 두개의 곡교를 포함한 18개의 구비를 갖는 등산로를 만들고 산정상에는 신정을 세워 편계일현정(偏界一賢亭)이라 하였다. 금병산은 연한 응회암으로 되어 있어 몽창은 건축물을 짓기 우해 산을 깍고 땅을 고루어 두개의 큰 동굴을 만들었는데 산을 향한 왼편것을 천녀동(天女洞), 오른편것을 보광굴(保光窟)이라 했다. 보광이란 빛을 내면에 감추어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좌선의 장으로 만든것이다.
→ 서천사의 후원은 편계일현정과 18곡로, 아래편의 동굴과 못이 일체되는 "마애의 조각적 산수경 원"이라 할 수 있다.
◆ 서방사경원(西芳寺景園)
서방사경원은 임제종선사 경내에 있고 경원에는 10여종의 이끼류가 지표면을 덮고 있어 태사(苔寺)라고도 하며 가마꾸라시대의 초기에 이룬 고산수지천회유식으로 면적은 약 17,000㎡에 이른다. 사찰은 원래 정토종에 속한 것이었으나 몽창국사가 입산한뒤 선종사찰로 바뀌었다. 경원은 상, 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지며 아래편은 옛날에 서방교원의 터로서 해안풍의 지안천을 갖춘 황금지를 중심으로 한 경원이 있다. <心>자형을 갖춘 황금지는 배를 띄울 수 있는 회유식 형태로서 못안에는 3개의 섬이 있고 요월교라는 지붕이 있는 다리도 있다. 황금지의 본당의 방장 사이에는 소지가 있는데 여기에는 야박석(夜泊石) 여러 덩이가 놓여 있다. 이것은 정토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항구에 배가 정박하여 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인데 입항, 출항의 모습은 보물을 찾아 나갈떠와 싣고 들어올때의 모습을 상징한 것으로 금각사의 지원에서도 볼 수 있다.
※ 고산수지천회유식 경원 : 서방사(가마꾸라시대), 자조사(은각사 - 실정시대)
◆ 남선원경원(南禪院景園)
1287년에 귀산상황이 이곳에 이궁을 꾸미고 경원은 원의 범축선선사에 의뢰하여 만들었는데 스스로 못을 파고 흙을 날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못은 소춘정(銷春亭)곁에 있어 그 그림자가 못에 반영되었으며 못의 형태가 용을 닮아 용지라고도 하였다. 못에는 커다란 다리가 걸렸고 네 귀에는 소나무, 남쪽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여기에는 창원천이라는 샘이 있는데 귀산상황은 못과 함께 이 샘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경원의 면적은 530평에 이르며 방장서원의 남쪽과 서쪽이 경원으로 되어 있다. 산기슭에 방장형의 못이 두개가 있고 서쪽 못에는 심자도(心字島)라는 섬이 있는데 그 형태가 <心>자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자연의 암반을 노출시켜 섬으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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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30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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