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帝에게 충성을 맹약하면서 보낸 上表文(478년)에서 그의 父王이 高句麗를 치려다 그 직전에 죽었다는 것과, 자신이 이를 이어 군대를 훈련하고 있다는 귀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5세기초 高句麗와 그렇게 격렬하게 한국땅에서 마주쳤던 북 큐슈의 倭라면 말이 안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즉 분명히 이 倭라면 上表文에 요란하게 그 이야기가 나올텐데 上表文의 倭는 高句麗와 처음 전쟁을 해 보려다 못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이 당시 일본이 야마토로 통일되어있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任那日本府說의 주체자료인 日本書紀를 알아보자. {日本書紀}에서 소위 神功皇后의 新羅정벌 기사와 이에 계속되는 임나문제관계 초기 서술들을 따져 보면 그 서술체계가 전연 허위임을 알게 된다. 일본학자들 조차 인정하지 않는 神功皇后 설화는 순전히 조작된 것이고, 이것은 7세기 후반 齊明女王이 百濟 멸망 당시 新羅·唐세력을 반대하여 자기 군대를 지휘, 북 큐슈까지 나갔던 역사적 사실에서 나온 것을 과장·왜곡하여 '神功皇后'의 설화로 실었던 것이다. 이는 7∼8세기 反新羅 소동의 극단분자들의 서투른 위작인 것이다.
특히 任那日本府는 일본 고문헌에서 앞뒤가 맞지 않게 모호하게 처리되어있다. 즉, 그 출발점 역시 247년 神功皇后 47년에 百濟·新羅 사신이 가져온 공물을 조사하니 新羅가 百濟 물건을 빼앗은 것이 탄로나서 군대를 보내 新羅를 치게 했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은 치러간 목적 국가는 新羅였는데 공격받은 곳은 伽倻 지역일대이고, 종결은 百濟王의 야마토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 되어있다. 대단히 황당한 설화로써 일본학자들은 神功皇后의 AD200년의 정벌은 사실이 아니라도 2차 정벌은 百濟王의 이름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을 들어 연대가 1세기 가량 잘못된 것이라 몹시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는 멀지 않은 원정인데도 공격과 관련된 준비과정의 서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 열도내에 있는 우리 삼국의 소국을 공격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대체로 {日本書記}의 내용을 총괄해서 살펴보면, 유일 야마토 국가가 삼국에 힘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주민 세력이 있는 각지로 통일전쟁을 벌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또 일본서기의 일본과 삼국의 관계는 때에 따라 변동은 있었겠으나 일본내의 이주민 소국들의 고국을 위한 군사동원과 공납은 계속 이어졌고, 우리 삼국 역시 왜땅의
우리계통 통치자에게 관복과 무기, 복장 등을 댓가로 하사했고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후세 史家들의 붓끝이 이를 부정하려 해도 百濟귀족과 동일한 복장을 한 倭땅의 왕들이 百濟에 臣屬된 자신의 지위에 만족해 땅속에 들어갈 때도 그러한 官服과 武器·馬具를 몸에 붙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던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임을 말없는 유적과 유물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Ⅳ. 結 論
부실한 역사실력으로 여러 가지 책을 뒤적이다 보니 任那日本府에 대해 정리보다는 혼란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여러 의견과 여러 방면에서 고찰한 바로는 대충 이런 말들로 나의 견해를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任那日本府를 민족주의적 감정의 차원에서 무조건적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차근차근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대에 한반도 남부가 日本에 식민지배 당했다고 하는 것이 치욕적이라고 하여도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물론 사실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사실 1600년전 그 당시인들이 지금 우리와 같은 민족공동체의식이나 국민의식이 존재했을 리 없고(국가나 군주에 상관없이 자신들의 생활이 만족스럽기만 했으면 그만이었으므로), 지난 역사의 주체는 그 시대를 살던 그 당시인들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민족으로써의 개념을 대입할 때 앞뒤가 안 맞아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전제를 분명히 기억할 때 생각할수 있는 것이 新羅나 高句麗 보다는 百濟人들이 倭人들에게 더 많은 민족의식을 느꼈다면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분명하게 깔려있는 상태에서 비록 三國의 分國이 日本에 있었고 그 皇家가 百濟系라 해도 그것은 우리민족이나 우리 국가의 일부가 아님으로 자랑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日本人이 되었고, 오늘날 日本人들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오해하기 쉬운 혈통이나 영토로써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민족은 그가 흑인이건 백인이건 그 국가의 문화와 습속으로 결정지어 진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日本書紀}가 비록 황당한 설화나 당시의 상황에 비춰볼 때 말도 안되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해도 그것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 속에는 진실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을 역사가가 각종 史料의 批判을 통해 규명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객관적 사료라 해도 그 시대의 정치상황이나 감정에 의해 조금의 과장이나 거짓이 들어있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직도 임나일본부는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며 서로 다른 논지에 여러 사료를 가져다 붙이는 형국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역사는 분명히 당시의 사실을 정확히 고찰해 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任那日本府는 韓·日 양국의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학문적·이성적 차원에서 그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수반될 때 안개에 싸여있는 그 시대의 역사가 그 실체를 드러내고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__ 참고문헌 __
♤ 尹錫曉 著, {伽倻史}, 民族文化社, 1990
♤ 金泰植 著, {伽倻聯盟史}, 大正文化社, 1993
♤ 崔在錫 著, {日本古代史硏究批判}, 一志社, 1990
♤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百濟, 前期新羅 및 伽倻史}, 백산자료원, 1991
♤ 李鍾恒 著, {古代伽倻族이 세운 九州王朝}, 大旺社, 1987
♤ 千寬宇 著, {韓國史에서 본 騎馬民族設}, 讀書生活, 1976
♤ 李進熙 著, {韓國과 日本文化}, 乙酉文化社, 1982
♤ 李炳銑 著, {任那日本과 對馬島}, 亞細亞文化社, 1987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11.07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256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