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목판인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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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목판인쇄(木板印刷)의 기원 및 보급
(1) 목판인쇄(木板印刷) 기원의 전제적 여건

2. 신라시대 간행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 내용과 특징
(2) 의의와 가치
(3) 외국 목판 인쇄물과의 비교

3. 대장경판의 개판설

4. 신라말기의 목판인쇄

5. 고려 초기의 인쇄술
(1) 신라 인쇄술의 계승
(2) 보협인다라니경
(3) 대장경의 조조(雕造)

6. 사판(私板)
(1) 사찰판
(2) 사가판

7. 관판(官版)
(1) 고려조 관판의 개판과 특징
(2) 조선조 관판의 개판과 특징

8. 국왕 및 왕실판(王室板)
9. 서원판(書院板)
10. 방각판(坊刻板)
11. 시전지판과 능화판
12 판각(板刻) 및 인출방법(印出方法)

※ 목활자의 종류
※ 참고자료

본문내용

공급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교서관 필서체자'라고 한다. 교서관 필서체자는 또한 숙종 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목활자도 있는데, 이는 초기의 활자보다 크기가 작고 단정한 모양을 띄고 있다.
생생자는 정조 16년(1792) 청나라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들어 있는 취진판《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를 글자 본으로 삼고 황양목을 사용하여 만든 목활자로 크고 작은 활자가 32만 여자에 이른다. 본 활자는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목활자 중 가장 대규모로 관서에서 제조한 목활자인데, 철종 8년(1857)의 주자소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전해 오는 인본을 보면 큰 활자는 글자 모양이 넓적하고 글자 획이 굵은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며, 작은 활자는 근대식 활자처럼 글자 모양이 가는 인서체이다. 본 활자는 원래 어제(御題)를 찍기 위해 만든 활자이므로 새김이 매우 정교하여 인본의 모양 또한 정연하면서도 미려하다. 이 때문에 인본들은 본 목활자를 글자 본으로 하여 훗날 만든 정리자의 금속활자 인본을 방불케 하여 식별이 거의 어려울 정도이다. 다만 작은 자를 볼 때 크기가 다소 작고 글자 획이 가늘어 동일한 글자의 활자 모양이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글자 획이 가지런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 겨우 식별이 가능할 뿐이다.
6) 학부 인서체자(學部 印書體字)와 야소삼자경자(耶蘇三字經字)
고종 31년(1894)의 갑오경장으로 관제 개혁이 거듭되어 내각의 명칭 아래 7개 부(部)가 새로 마련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교육을 담당하는 학부(學部)였다. 학부 편집국에서는 당시의 새로운 문물과 근대화 의식을 수용하기 위해 교과서의 개편 작업이 시급했는데, 그 결과 무쇠로 만들어 쓰다가 마모되어 방치해 둔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와 이를 바탕으로 인서체 목활자를 만들어 개편된 교과서를 다량으로 찍어냈다. 이 때 사용한 목활자를 '학부 인서체자'라 부르며, 특히 한글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를 '학부 인서체자 병용 한글자' 또는 '학부 한글자'라 일컫는다. 이들 인본을 살펴보면 글자 획이 가늘게 닳고 일그러진 것은 교서관 인서체 철활자이고, 글자 획이 굵고 먹색이 시커멓게 묻은 것은 새로 만든 학부 목활자이다. 그리고 한글활자는 모두 목활자로 새로 만든 것들이다. 이들 목활자는 응급적인 조치로 서둘러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 획이 가지런하지 않고 활자 모양이 정연치 않아 인쇄상태가 조잡한 편이다. 본 활자의 인본은 고종 32년(1895)부터 몇 년 동안 각 분야의 교과서를 다양하게 찍어 보급했기 때문에 현재 많은 종류가 전해 오고 있다.
야소삼자경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어린이용《훈몽삼자경》의 체제를 본 떠서 만든《야소삼자경》을 찍기 위해 만든 목활자이다. 인본은 한자로 번역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 대목을 큰 한자 밑에 작은 한글자로 훈과 음을 표시하고 끝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 인쇄해 냈다. 이를 총칭하여 '야소삼자경자'라고 하며, 구체적으로는 한자 큰 자를 '야소삼자경 대자', 한글 작은 자를 '야소삼경 한글자'로 일컫는다. 본 활자의 인본은 현재 3종이 발표되었는데, 아동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교육시키려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자의 초보적 교습을 위한 부차적인 목적도 함께 수행할 수 있도록 엮어진 것이 큰 특징이다.
7) 기타 목활자
지금까지 살펴본 주요 목활자들을 제외하고도 조선 시대에는 많은 목활자들이 만들어 사용되었고 현재 전해오는 인본 또한 매우 다양하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서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현재 전해오는 것만 해도 중종 때 나주목에서 만든 '금성자(錦城字)', 명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이 사사로이 만든 '호음자(湖陰字)', 광해군 때 평양에서 만든 '추향당자(秋香堂字)', 그리고 선조 18년(1585)에 교정청에서《효경대의》를 찍기 위해 만든 '효경대자(孝經大字)'의 인본 등 많이 있다. 이 외에도 서울을 비롯해 지방의 여러 도시와 각 서원 등에서도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다양하게 찍어냈지만 기록이 제대로 전해 오지 않고 인본 또한 별로 나타나지 않아 이들 목활자의 내력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 내의원 같은 중앙 관서나 지방관서의 감영은 물론 서원이나 사찰, 또는 민간인들이 사사로이 많은 목활자를 만들어 각종 서책이나 문집, 족보 등을 인출하는데 사용하였다. 이들 중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41년(1608)부터 광해군 7년(1615)까지의 사이에 내의원의 의관(醫官)들이 의서를 엮은 다음 이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내의원자(內醫院字)'를 비롯해 광해군 13년(1621)에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조(鄭造)가 그의 친구인 문계박에게 의뢰해 만든 '문계박자(文繼朴字)', 17세기 후반에 나주목에서 만든 '나주자(羅州字)', 정조 21년(1797)에《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인출하면서 사용한 '춘추강자(春秋綱字)', 동왕 22년(1798)에 김한동(金翰東)이 조상의 문집을 찍기 위해 평남 성천에서 만든 '성천자(成川字)' 등이 있다.
이 후에도 많은 목활자가 개인들에 의해 사사로이 만들어졌는데, 순조 10년(1810)에 장훈이 사적으로 책을 찍기 위해 소형 목활자로 만든 '장혼자(張混字)', 동왕 15년(1815)에 예조판서 등을 지낸 남공철(南公轍)이 자신의 저서를 찍기 위해 만든 중간 자와 작은 자의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 동왕 25년(1825)에 박병은(朴秉殷) 등이《증주삼자경》을 인출하기 위해 만든 '훈몽삼자경자(訓蒙三字經字)', 그리고 고종 6년(1869)에 양주의 보광사에서 불서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보광사자(寶光寺字)'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목활자가 있었으며, 이들의 인본 또한 다양하게 전해 오고 있다.
※ 참고자료
국가기록유산
http://user.chollian.net/~kdhgadin/2-24.htm
http://blog.daum.net/wsadcom/73 - 우성애드컴(주)
한국국학진흥원(조선시대 선비의 삶)
대한인쇄연구소
한국전적인쇄사 - 천혜봉
신라석탑의 예술세계 - 박준식
네이버캐스트: 아름다운 한국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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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0페이지
  • 등록일2011.09.01
  • 저작시기2011.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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