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속공예-역사와 현대화 방안
본 자료는 8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해당 자료는 8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8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의 금속공예-역사와 현대화 방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序論)

Ⅱ.본론(本論)
1.금속공예 기법
2.금속공예 재료
3.금속공예의 역사
1.청동기 시대
1)무기
2)의기
2.역사시대
1)장신구
2)범종
3)사리구

Ⅲ.結論(현대화방안)

▶첨부: (한국의 금속공예에 관한 신문자료, 사진첨부, 참고문헌)

본문내용

속공예전공 석사과정
한겨레(
),
【첨부내용사진들】
다뉴세문경 (국보141호)-
1971 년 12월 21일 국보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지름 21.2cm이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토되었다
금제관식(국보 154호-충난공주시 웅진동 국립공주박물관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백제때 금으로만든 왕관 꾸미개 한쌍이다.
금제태환이식
가운데 빈 공간으로 하여 무게를 가볍게 한 귀걸이를 말한다.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 중앙 박물관:경주보문동의 부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한쌍의 금귀걸이로 길이 8.7cm이다.
금관총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 중앙박물관: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
은제 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 국립공주 박물관 :공주시 무녕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
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새겼다.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신발- 고려시대 안동태사묘삼공신유물(보물 451):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토벌할 때, 활약한 공로로 대광태사란 벼슬을 받은 권행, 김선평, 장정필 3명의 위패가 있는 태사묘의 유물이다. 유물 가운데 높이 29㎝, 바닥길이 28㎝인 목이 길다란 가죽 신발이다. 신발 안쪽에는 마(麻)를 대었고, 바닥은 두꺼운 가죽을 여러 겹 대고 꿰매었다. 목은 청색의 마를 대었으며, 앞 축은 위로 말려 반원 모양을 하고 있다.
상원사 동종 국 36호; 강원 평창군 진부면 상원사 소재-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보림사보존선사창성탑 (보물 157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통일신라시대-보림사에 세워져 있는 사리탑으로, 보조선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보조선사(804 880)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흥덕왕 2년(827)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희강왕 2년(837)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문성왕 2년(840)에 귀국하여 많은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헌안왕 3년(859)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보조선사'라 하고, 탑 이름을 '창성'이라 내리었다
◈문화재청 (
/) 사진발췌◈
【한국 금속공예의 아름다움】
⊙별전(別錢)
(조선시대, 길이 4.5cm)
(좌)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별전으로, 특히 가슴과 음부가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고 그 뒷면에는 '百子天孫'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많은 자손을 바라는 의미로 부녀자들이 패용한 동전으로 보입니다.
(우) 유제 별전으로 한 면에 신랑 신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 태극무늬와 '富貴多男壽福康寧'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부귀와 부부의 금실, 남아의 출산을 바라는 의미로 부녀자들이 패용한 동전으로 보입니다.
⊙수저(匙著)
(조선시대, 숟가락 길이 26.5-29.5cm. 젓가락 길이 19.5-27.0cm.)
모두 유기로 제작되었으며 시면이 비교적 둥글고 자루 부분이 곧은 조선시대의 수저입니다. 별다른 문양은 없으나 왼쪽의 수저는 한쌍으로 끝부분이 4분된채 세 개의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원앙단추(鴛鴦紐)
(고려시대, 길이 2.2cm, 두께 0.5cm)
투각과 음각기법을 이용하여 원앙과 모란, 연꽃 등 길상(吉祥)을 뜻하는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 금제품은 한 개에 두 마리 원앙이 새겨져 있습니다. 수법이 정교하고 세련된 멋이 넘칩니다.
  입사공예
입사란 금속표면을 원하는 문양으로 파거나 쪼아내 바탕부분에 또다른 무른 금속들을 박아 넣어 색상과 문양을 나타내는 작업으로, 정교한 문양을 새겨 입사해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분야의 작업과정보다도 힘들며 긴 시간을 두고 어려운 과정입니다.
입사공예는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을 통해 소개되어 이미 삼국시대에 이르면 고분 출토품에서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세공술이 나타납니다. 입사기술에는 크게 엽사기법과 입사기법 두가지가 있는데 고려시대에 들어 다른 상감기법과 함께 광범위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공조(工曹) 내에 입사장을 두어 전통적 기교를 계승하고 필요한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습니다. 조각기법은 거의 모든 공예품에 이용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청동기시대의 여러 유물들에서 수준 높은 솜씨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조각에는 평각(平刻) 투각(透刻) 고각(高刻) 육각(肉刻) 상감(象嵌)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평각은 일명 음각이라고 하는데 평면에 문양을 쪼아서 나타내는 기법이고, 투각은 기물에 투공을 내서 이루어지는 기법 (일명 금필기법), 고각은 기물에 문양을 도드라지게 또는 튀어 나오게 하는 기법 그리고 육각은 재료의 표면과 내면을 정으로 두들기거나 우그려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을 말합니다.
⊙은입사철합(銀入絲鐵盒)
(조선시대, 가로 11.4cm, 세로 9.3cm, 높이 5.9cm)
철제 합으로 귀중품이나 장신구 등을 담아두던 것입니다. 바닥을 제외한 전면에 엽사수법으로 무늬를 새겼는데, 뚜껑에는 두 마리의 학, 가로면에는 각각 원숭이와 사슴 그리고 세로면에는 각각 원앙과 국화문양을 그렸습니다. 입사수법을 통해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한 표현효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한양대 박물관 사진)
http://my.netian.com/~jesesoft/rest/rest.htm
- 사진 참조
  • 가격3,000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04.11.14
  • 저작시기2004.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336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