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 요
Ⅱ. 의 의
1. 기록정신
2. 농업생산력 극대 위한 농업 시설물 확충
3. 다목적 기능의 신도시
4. 과학성이 돋보이는 축조기술
5.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 을묘원행
Ⅲ. 정조의 정치사상
Ⅱ. 의 의
1. 기록정신
2. 농업생산력 극대 위한 농업 시설물 확충
3. 다목적 기능의 신도시
4. 과학성이 돋보이는 축조기술
5.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 을묘원행
Ⅲ. 정조의 정치사상
본문내용
여 문신들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왕 스스로도 문신들과의 토론을 통해 정치의 밑거름으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영조의 탕평 정치를 계승하면서도 척족戚族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는 한편, 사림들을 등용하고 학문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정국 구도로 정조의 입지는 약했던 것이 즉위 초 조정의 상황이었다. 정조 12년에 가서야 정조는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여 노론(영의정 김치인), 소론(좌의정 이성원), 남인(우의정 채제공)의 삼상三上 보합補合 정권을 출범시킨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천봉하게 되는 정치적 상황은 이런 삼당 보합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조는 즉위 13년 만에 비운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초라한 묘원을 수원으로 옮겨 숙원을 이루고, 수원을 자신의 선산이 있는 고향에 비유하는 한편,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신하들까지도 사도세자의 영전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이를 통해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드높이는 계기로 삼고, 사도세자의 허물을 벗겨내는가 하면, 수원의 위치를 격상시키는 기회로 만들었다. 또한 한 발 앞서서 개혁 정치를 펼칠 절호의 기회이자 장소로 수원을 지목하기에 이른다. 서울의, 입장이 다른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개혁 정치를 펼치기에는 수원이 그 입지나 군사적 위상에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원을 고향으로 생각한 정조에게 있어 만연된 붕당의 현실이 있는 서울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탕평 정치를 계승하고 노론, 소론, 남인의 보합 정치를 펼치는가 하면, 채제공의 독상 정치로도 정국을 이끌었으며, 다시 노론 시파와 남인의 갈등이 심해지자 채제공을 삭탈관작하여 문외출송하고, 노론 시파의 정권을 출범 시키면서부터는 노론의 남인에 대한 공세를 늦추기 위해 문체반정으로 노론을 견제한다.
노론의 상징적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공자나 맹자 주자 같이 송자로 격상시키고는 노론계 문신들의 문체가 정통적 문체와 거리가 있다 하여 노론을 제압해 나가니 문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빌미로 노론의 입지를 약화시킨 것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들고 노론을 제압한 놀라운 정치력을 보이는 것과, 이보다 앞서(16년 4월) 정조에게 경연에 더욱 열심히 참석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유성한이 올리자 국왕을 업신여긴다며 단죄 시켜 버린 것은, 정조의 정치력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스스로 정치적 자신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보겠다.
이런 자신감은 화성 성역을 계획하게 되는 것이니, 화성 성역의 이면에는 정조의 정권 장악력과 개혁 의지가 동시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불안한 나날을 지낸다. 최측근 홍국영으로 하여금 호위를 맡게 하였으나 정조 3년 홍국영이 축출되면서 숙위소도 폐지되었다. 홍국영의 세도 정치로 인해 조정이 시끄러운 줄 알면서도 정조는 군신들의 이목을 홍국영에게 쏠리게 하면서 물밑 조율을 통해 규장각을 확대하는 정치력을 보인다. 정조 6년에는 숙위 장교로 장용위를 구성하여 친위군영을 삼는다.
그리고 정조 8년 사도세자의 존호를 올리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벌인 경과에서 무과 급제자를 대거 합격시키는데 이들을 수용해서 장용위를 발전시킨다. 정조 11년의 장용청 체제로 과도기를 지내다가 12년 장용영을 발족시켜 군사 기반을 구축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킨다.
장용영은 이제 국왕의 숙위 군영에서 친위 부대로 격상됨과 동시에 장용대장 제도(정조 15)를 두고 국왕이 직접 대장을 임명함으로써 다른 군영과 동급의 군으로까지 위상을 높인다. 그리고 정조 17년(1793) 1월에는 수원에 행차하여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이라 고쳐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수원 유수는 장용외사와 행궁정리사를 겸하게 했다. 장용영은 서울의 내영과 수원의 외영으로 확대되었는데 '외영을 위해 내영을 세웠다.'고 정조 자신이 말할 정도로 장용외영의 면모는 대단했다.
수원, 강화, 개성, 광주유수부 중 수위의 유수부로 수원을 격상시켜 정2품 이상의 대신급이 총찰하게 한다. 이런 정치적인 위상에 걸맞게 군사적으로도 장용외영이 설치된 수원은 서울에 버금가는 대도였던 것이다. 이는 다음 해인 정조 18년 화성의 축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정조 20년의 을묘원행은 화성의 축조 과정에서 벌인 대규모의 국가적 행사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동갑내기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그 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주고 싶은 생각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성역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왕실의 회갑연을 연다는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야 되고 물자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수원에서 혜경궁의 회갑연을 베풀었다는 것은 한 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수원의 위상을 행동으로 높여보겠다는 의지와 아버지가 누워 있는 수원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겠다는 의지, 그리고 대규모의 행사를 수원에서 벌임으로써 군신들의 동태를 확인하고픈, 중간 평가의 의미까지 계산했던 것이 정조의 생각이라 보여진다.
이 대규모 행사에서 정조는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었던 듯, 갑자년(1804)이 되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에 내려가 상왕으로 머물겠다는 뜻을 피력한다. 갑자년은 육십갑자의 최초이고,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이면서 어머니 혜경궁의 칠순이 되는 해이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정조 자신이 누누이 강조했던 것처럼 수원은 이미 그의 고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성 행궁의 전각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당이나 미로한정에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세자인 순조가 태어나는 해가 정조 14년인데,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고 나니 상서로운 태기가 있다며 이를 축복하는 한편, 천장의 당위성을 입증하면서 이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포장하여, 혹시라도 남아 있는 반대 세력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랬으니 수원을 생각한 정조의 마음은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도 예기치 않은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끝내 수원에서의 노후를 보내지 못했다. 또한 정조의 선위 후 수원으로의 낙향설 때문에 수원은 서울을 수원으로 옮기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등의 오해도 받았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정국 구도로 정조의 입지는 약했던 것이 즉위 초 조정의 상황이었다. 정조 12년에 가서야 정조는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여 노론(영의정 김치인), 소론(좌의정 이성원), 남인(우의정 채제공)의 삼상三上 보합補合 정권을 출범시킨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천봉하게 되는 정치적 상황은 이런 삼당 보합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정조는 즉위 13년 만에 비운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초라한 묘원을 수원으로 옮겨 숙원을 이루고, 수원을 자신의 선산이 있는 고향에 비유하는 한편,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른 신하들까지도 사도세자의 영전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이를 통해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드높이는 계기로 삼고, 사도세자의 허물을 벗겨내는가 하면, 수원의 위치를 격상시키는 기회로 만들었다. 또한 한 발 앞서서 개혁 정치를 펼칠 절호의 기회이자 장소로 수원을 지목하기에 이른다. 서울의, 입장이 다른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개혁 정치를 펼치기에는 수원이 그 입지나 군사적 위상에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원을 고향으로 생각한 정조에게 있어 만연된 붕당의 현실이 있는 서울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탕평 정치를 계승하고 노론, 소론, 남인의 보합 정치를 펼치는가 하면, 채제공의 독상 정치로도 정국을 이끌었으며, 다시 노론 시파와 남인의 갈등이 심해지자 채제공을 삭탈관작하여 문외출송하고, 노론 시파의 정권을 출범 시키면서부터는 노론의 남인에 대한 공세를 늦추기 위해 문체반정으로 노론을 견제한다.
노론의 상징적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공자나 맹자 주자 같이 송자로 격상시키고는 노론계 문신들의 문체가 정통적 문체와 거리가 있다 하여 노론을 제압해 나가니 문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빌미로 노론의 입지를 약화시킨 것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들고 노론을 제압한 놀라운 정치력을 보이는 것과, 이보다 앞서(16년 4월) 정조에게 경연에 더욱 열심히 참석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유성한이 올리자 국왕을 업신여긴다며 단죄 시켜 버린 것은, 정조의 정치력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스스로 정치적 자신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보겠다.
이런 자신감은 화성 성역을 계획하게 되는 것이니, 화성 성역의 이면에는 정조의 정권 장악력과 개혁 의지가 동시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불안한 나날을 지낸다. 최측근 홍국영으로 하여금 호위를 맡게 하였으나 정조 3년 홍국영이 축출되면서 숙위소도 폐지되었다. 홍국영의 세도 정치로 인해 조정이 시끄러운 줄 알면서도 정조는 군신들의 이목을 홍국영에게 쏠리게 하면서 물밑 조율을 통해 규장각을 확대하는 정치력을 보인다. 정조 6년에는 숙위 장교로 장용위를 구성하여 친위군영을 삼는다.
그리고 정조 8년 사도세자의 존호를 올리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벌인 경과에서 무과 급제자를 대거 합격시키는데 이들을 수용해서 장용위를 발전시킨다. 정조 11년의 장용청 체제로 과도기를 지내다가 12년 장용영을 발족시켜 군사 기반을 구축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시킨다.
장용영은 이제 국왕의 숙위 군영에서 친위 부대로 격상됨과 동시에 장용대장 제도(정조 15)를 두고 국왕이 직접 대장을 임명함으로써 다른 군영과 동급의 군으로까지 위상을 높인다. 그리고 정조 17년(1793) 1월에는 수원에 행차하여 수원부의 이름을 화성이라 고쳐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수원 유수는 장용외사와 행궁정리사를 겸하게 했다. 장용영은 서울의 내영과 수원의 외영으로 확대되었는데 '외영을 위해 내영을 세웠다.'고 정조 자신이 말할 정도로 장용외영의 면모는 대단했다.
수원, 강화, 개성, 광주유수부 중 수위의 유수부로 수원을 격상시켜 정2품 이상의 대신급이 총찰하게 한다. 이런 정치적인 위상에 걸맞게 군사적으로도 장용외영이 설치된 수원은 서울에 버금가는 대도였던 것이다. 이는 다음 해인 정조 18년 화성의 축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정조 20년의 을묘원행은 화성의 축조 과정에서 벌인 대규모의 국가적 행사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동갑내기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그 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주고 싶은 생각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성역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왕실의 회갑연을 연다는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야 되고 물자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수원에서 혜경궁의 회갑연을 베풀었다는 것은 한 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수원의 위상을 행동으로 높여보겠다는 의지와 아버지가 누워 있는 수원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겠다는 의지, 그리고 대규모의 행사를 수원에서 벌임으로써 군신들의 동태를 확인하고픈, 중간 평가의 의미까지 계산했던 것이 정조의 생각이라 보여진다.
이 대규모 행사에서 정조는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었던 듯, 갑자년(1804)이 되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에 내려가 상왕으로 머물겠다는 뜻을 피력한다. 갑자년은 육십갑자의 최초이고,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이면서 어머니 혜경궁의 칠순이 되는 해이기 때문인 듯하다.
또한 정조 자신이 누누이 강조했던 것처럼 수원은 이미 그의 고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성 행궁의 전각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당이나 미로한정에 정조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세자인 순조가 태어나는 해가 정조 14년인데,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기고 나니 상서로운 태기가 있다며 이를 축복하는 한편, 천장의 당위성을 입증하면서 이는 하늘의 축복이라고 포장하여, 혹시라도 남아 있는 반대 세력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랬으니 수원을 생각한 정조의 마음은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도 예기치 않은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끝내 수원에서의 노후를 보내지 못했다. 또한 정조의 선위 후 수원으로의 낙향설 때문에 수원은 서울을 수원으로 옮기기 위해 건설되었다는 등의 오해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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