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경기체가의 형성 과정
1) 宋詞․宋樂의 유입
2) 전통 시가로부터의 기원
3. 경기체가의 변모 과정
4. 향유방식의 변화로 인한 쇠퇴
5. 결론
2. 경기체가의 형성 과정
1) 宋詞․宋樂의 유입
2) 전통 시가로부터의 기원
3. 경기체가의 변모 과정
4. 향유방식의 변화로 인한 쇠퇴
5. 결론
본문내용
경기체가는 초기에 악장으로 대집단 연향에서 불리다가 점차 사대부들의 잔치자리 등 소집단이나 사적인 연향을 위한 노래로 변모하였다. 또 연향적 성격을 상실 한 채 포교의 한 방법으로서 가창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연행기반을 바탕으로 하면서 경기체가의 형식이 변화될 수 있다는 단초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여전히 가창의 방식으로 향유되었기에 가창되기 위한 형식적 특성은 지키려 하였다.
그런데 사대부층의 공적 연향이나 사적 연향에 쓰였던 경기체가는 기존의 노래들을 활용하여 부르게 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창작은 하지 않게 되었다. 악장은 성종대 이후로는 더 이상 창작되지 않는데, 이는 성종대에 이르러 예악이 정비되고, 궁중에서 불리던 음악이나 노래가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창작된 악장으로 계속 노래 부를 수 있게 됨으로써 새로운 악장의 창작이 활발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경기체가가 연행, 특히 공적 연향에 쓰이는 악장으로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새롭게 창작되는 경기체가는 그 향유상황과 향유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서원의 제향에 쓰이는 노래로, 혹은 암송하기 위한 것으로, 혹인 개인의 감회를 나타내는 서정적 노래로 변모되면서 향유방식이 가창이 아닌 음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중종대 주세붕에 의하여 창작된 경기체가는 서원의 제사의식에 사용하기 위한 창작이 있기도 했지만, 아동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암송하게 하였다. 평상시에 어린 아동들이 그 내용을 모두 암송할 수 있게 하여 성현의 생활을 본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렬적 독립적이던 연장형식을 각 장의 친연성이 커지게 하여 순차적으로 배열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경기체가가 그 내용을 외우고 읊게 하기 위하여 창작되면서 경기체가의 형식은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되고, 전후절 분절성이 없어져 후소절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연행관습과 관련하여 집단 향유의 방식으로 연행되던 경기체가는 연행기반의 변화와 더불어 개인적인 문학으로 바뀌었다. 즉 「독락팔곡」은 개인의 성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독락팔곡」에 와서는 그 형식적 측면에서 경기체가와의 관련성을 찾기 어렵게 되고, 시조와 가사의 형식에 가까워진다. 율격면에서 가사에 가까워 진 것이라든지, 시조 종장에 나타나는 공식구들의 사용 등은 시조와 가사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체가의 음영성정을 표현하는데 적당하게 하기 위하여 형식의 변모를 시도하였으나, 시조와 가사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시조와 가사 형식이 개인의 음영성정을 표현하는데 적당한 형식임을 입증해주었을 뿐이었다.
김동임, 앞의 논문, 61-64쪽 참조.
형식의 변모와 향유방식의 변화는 경기체가가 더 이상 하나의 문학 장르로 존립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이황은 陶山十二曲跋에서 「한림별곡」에 대해 "한림별곡의 類는 문인의 입에서 나왔으나 矜豪放蕩하며, 더욱이 군자가 숭상할 바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뒤, 시조형식을 수용하여 「도산십이곡」을 지음으로써 경기체가보다는 시조가 사대부 문학으로 적당한 형식임을 인정하였다. 사대부 문학으로 시조가 적당한 형식임이 인정되면서 사대부들은 경기체가보다는 시조 창작에 박차를 가하였고, 시조 창작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렇듯 사대부들의 가창문학으로 시조와 가사가 발달해 가면서 경기체가는 국문시가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더구나 임란을 계기로 하여 백성들의 지배층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서민의식이 싹트게 되자, 순전히 사대부 문학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경기체가는 더 이상 창작될 기반이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5. 결론
지금가지 경기체가의 형성과 변천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기체가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宋詞·宋樂의 유입과 우리 전통 시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규범으로 활용했는데, 고려 중기에는 송과 밀착되면서 송사와 송악의 유입이 활발했다. 단순히 송사를 유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하여 불렀음이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악부나 詞의 음율은 매우 정교해서 우리나라 사람이 쉽게 지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새로운 시가 갈래가 요구되었고, 그 과정에서 경기체가가 형성되었다.
또한 경기체가는 우리 시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민요 형식에 사뇌가의 율격과 연장체적 특성이 개입되어 형성되었다. 유사성으로 지적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은 연장체라는 점과 전대절과 후소절을 사뇌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3음보와 4음보의 혼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경기체가는 4음보격 민요에 사뇌가의 율격적 특징이 개입되어 지식층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시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기체가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기본형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음수율을 바탕으로 기본형을 설정할 경우 음수를 통계내어 기본형을 도출했기 때문에 실제 작품에 적용해보면 맞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경기체가는 음보율을 기준으로 기본형을 도출해야 하는데, 이에 의하면 경기체가는 각 장이 6행이며 1-3행은 3음보, 4-6행은 4음보로 된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기본형을 이와 같이 설정하면 경기체가는 정격형, 변격형, 파격형으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경기체가가 더 이상 창작되지 않은 것은 향유방식의 변화와 연관이 있다. 경기체가는 초기에 악장으로 대집단 연향에서 불리다가 점차 사대부들의 잔치자리 등 소집단이나 사적인 연향을 위한 노래로 변모하였다. 또 연향적 성격을 상실한 채 포교의 한 방법으로서 가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경기체가가 연행, 특히 공적 연향에 쓰이는 악장으로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새롭게 창작되는 경기체가는 그 향유상황과 향유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서원의 제향에 쓰이는 노래로, 혹은 암송하기 위한 것으로, 혹인 개인의 감회를 나타내는 서정적 노래로 변모되면서 향유방식이 가창이 아닌 음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성종대는 시조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가사가 세력을 얻게 되어 경기체가는 상대적으로 당대인의 기호에서 멀어지게 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
그런데 사대부층의 공적 연향이나 사적 연향에 쓰였던 경기체가는 기존의 노래들을 활용하여 부르게 되면서 더 이상 새로운 창작은 하지 않게 되었다. 악장은 성종대 이후로는 더 이상 창작되지 않는데, 이는 성종대에 이르러 예악이 정비되고, 궁중에서 불리던 음악이나 노래가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창작된 악장으로 계속 노래 부를 수 있게 됨으로써 새로운 악장의 창작이 활발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경기체가가 연행, 특히 공적 연향에 쓰이는 악장으로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새롭게 창작되는 경기체가는 그 향유상황과 향유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서원의 제향에 쓰이는 노래로, 혹은 암송하기 위한 것으로, 혹인 개인의 감회를 나타내는 서정적 노래로 변모되면서 향유방식이 가창이 아닌 음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중종대 주세붕에 의하여 창작된 경기체가는 서원의 제사의식에 사용하기 위한 창작이 있기도 했지만, 아동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암송하게 하였다. 평상시에 어린 아동들이 그 내용을 모두 암송할 수 있게 하여 성현의 생활을 본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렬적 독립적이던 연장형식을 각 장의 친연성이 커지게 하여 순차적으로 배열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경기체가가 그 내용을 외우고 읊게 하기 위하여 창작되면서 경기체가의 형식은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되고, 전후절 분절성이 없어져 후소절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연행관습과 관련하여 집단 향유의 방식으로 연행되던 경기체가는 연행기반의 변화와 더불어 개인적인 문학으로 바뀌었다. 즉 「독락팔곡」은 개인의 성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독락팔곡」에 와서는 그 형식적 측면에서 경기체가와의 관련성을 찾기 어렵게 되고, 시조와 가사의 형식에 가까워진다. 율격면에서 가사에 가까워 진 것이라든지, 시조 종장에 나타나는 공식구들의 사용 등은 시조와 가사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체가의 음영성정을 표현하는데 적당하게 하기 위하여 형식의 변모를 시도하였으나, 시조와 가사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시조와 가사 형식이 개인의 음영성정을 표현하는데 적당한 형식임을 입증해주었을 뿐이었다.
김동임, 앞의 논문, 61-64쪽 참조.
형식의 변모와 향유방식의 변화는 경기체가가 더 이상 하나의 문학 장르로 존립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이황은 陶山十二曲跋에서 「한림별곡」에 대해 "한림별곡의 類는 문인의 입에서 나왔으나 矜豪放蕩하며, 더욱이 군자가 숭상할 바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뒤, 시조형식을 수용하여 「도산십이곡」을 지음으로써 경기체가보다는 시조가 사대부 문학으로 적당한 형식임을 인정하였다. 사대부 문학으로 시조가 적당한 형식임이 인정되면서 사대부들은 경기체가보다는 시조 창작에 박차를 가하였고, 시조 창작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렇듯 사대부들의 가창문학으로 시조와 가사가 발달해 가면서 경기체가는 국문시가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더구나 임란을 계기로 하여 백성들의 지배층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서민의식이 싹트게 되자, 순전히 사대부 문학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경기체가는 더 이상 창작될 기반이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5. 결론
지금가지 경기체가의 형성과 변천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경기체가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宋詞·宋樂의 유입과 우리 전통 시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규범으로 활용했는데, 고려 중기에는 송과 밀착되면서 송사와 송악의 유입이 활발했다. 단순히 송사를 유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하여 불렀음이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악부나 詞의 음율은 매우 정교해서 우리나라 사람이 쉽게 지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새로운 시가 갈래가 요구되었고, 그 과정에서 경기체가가 형성되었다.
또한 경기체가는 우리 시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민요 형식에 사뇌가의 율격과 연장체적 특성이 개입되어 형성되었다. 유사성으로 지적할 수 있는 형식적 특징은 연장체라는 점과 전대절과 후소절을 사뇌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3음보와 4음보의 혼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경기체가는 4음보격 민요에 사뇌가의 율격적 특징이 개입되어 지식층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시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기체가의 변천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기본형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음수율을 바탕으로 기본형을 설정할 경우 음수를 통계내어 기본형을 도출했기 때문에 실제 작품에 적용해보면 맞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경기체가는 음보율을 기준으로 기본형을 도출해야 하는데, 이에 의하면 경기체가는 각 장이 6행이며 1-3행은 3음보, 4-6행은 4음보로 된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기본형을 이와 같이 설정하면 경기체가는 정격형, 변격형, 파격형으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경기체가가 더 이상 창작되지 않은 것은 향유방식의 변화와 연관이 있다. 경기체가는 초기에 악장으로 대집단 연향에서 불리다가 점차 사대부들의 잔치자리 등 소집단이나 사적인 연향을 위한 노래로 변모하였다. 또 연향적 성격을 상실한 채 포교의 한 방법으로서 가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경기체가가 연행, 특히 공적 연향에 쓰이는 악장으로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새롭게 창작되는 경기체가는 그 향유상황과 향유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서원의 제향에 쓰이는 노래로, 혹은 암송하기 위한 것으로, 혹인 개인의 감회를 나타내는 서정적 노래로 변모되면서 향유방식이 가창이 아닌 음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성종대는 시조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가사가 세력을 얻게 되어 경기체가는 상대적으로 당대인의 기호에서 멀어지게 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