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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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폴레옹 전쟁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2. 혁명시대

3. 통령정부시대

4. 제정시대

5. 엘바와 백일천하

6.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7. 나폴레옹의 주요전투

본문내용

, 나폴레옹의 일가체제로 편성한 2개군사령관이 무능하여 부대진출이 지나치게 지연되었고 군마의 상실이 너무도 켰다 또한 병사들의 훈련이 미숙하고 부하장군들도 나이가 들어 전과 같이 용맹성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자연적인 병력손실과 길게 연장된 병참선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후방에 남겨 두었기 때문데 8월 초순에 나폴레옹군의 주력은 230,000명으로 감소되었다.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면전투에서의 불리함을 인식하고 회피전술을 펴서 프랑스군의 병참의 어려움과 기후, 지형, 지성의 광협의 어려움으로 나폴레옹군의 군사력을 저해하고자 노력했다. 나폴레옹은 별 저항없이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점령하였고 크레물린관전을 점령함으로써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황제의 강화체의를 기다리며 계속 모스크바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러시아황제로부터의 답신이 없었다. 이는 나폴레옹군을 계속 모스크바에서 기다리게하여 혹독한 기후로 섬멸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이를 간파한 나폴레옹은 급히 철수를 시작했으나 전의 상실로 인한 프랑스군를 러시아군의 추격으로 11월 9일에 외관상의 외형을 간신히 유지하면서 스몰랜스크에 도달한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군을 재편하려 했으나, 미처 숙영할 새도 없이 후방에서는 쿠투소프군이 북방에서는 비트겐슈타인군이 남방에서는 치챠코프군이 진격해 오고 있으므로 철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베레지나강 전면에서 러시아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프랑스군은 37,000명의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나 러시아군은 144,000명이 압도적 우세로 나폴레옹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812년 6월부터 동년 12월까지 사이에 2,000km의 행군을 하였으며, 이 기산 중에 전사 100,000명, 동사 및 아사 150,000명 포로 100,000명을 내었다.
(7) 워터루 전역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된 후 루이 18세의 무능하고 반동적인 정책은 자유와 권리로 계몽된 국민을 실망케 하고 9월에 비엔나 회의에서는 국제관계가 다시 협악하게 되어 프랑스 국민은 왕조에 불만을 품고 있는 반면 나폴레옹에 대하여 숭배하는 동향이 생겨났다. 이때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1000여명의 충실한 부하를 이끌고 엘바섬을 탈출하여 3월 1일 아침 칸느 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파리를 향하여 북상하였다. 나폴레옹은 각국가에 평화를 선언했으나 다른 동맹국은 그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대를 결성해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해 나섰다.
나폴레옹은 과거 많은 전투에서 었었던 것처럼 동맹군을 분리시킨 후 각기 섬멸하려는 계획아래 전쟁을 시작했으나 과거 이탈리아전투시와 비교하면 나폴레옹군의 기동력은 저하되었고 반면에 적인 동맹군은 능력이 향상되어 있으며 또한 나폴레옹의 정력은 청년장군시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나폴레옹군은 고전을 면치못한 채 워터루전방에 도착한 웰린톤은 단독으로는 나폴레옹의 주력과 결전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계속해서 후퇴할 생각이었으나 와브르에 도착하여 부대를 재정비한 블루헤르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으므로 68,000명의 병력을 이 일대에 포진하여 18일에는 나폴레옹의 주력과 대치하였다. 나폴레옹이 18일 아침에 즉시 공격을 하였더라면 아직도 승리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전날 내린 비로 도로가 불량하여 기병의 기동이 곤란하며, 포병의 진지 진입이 예정대로 되지 못하여 공격을 지연시켰다. 11시에 공격을 시작하였을 때 나폴레옹군은 72,000명으로 약간의 수적 우세를 유지하면서 적의 우익을 압박하여 조금씩 진격하였다. 오후 1시가 되었을 때 기니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러시아의 뷰로브군대가 동쪽에서 나타났다. 그구쉬가 프러시아군을 견제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의 우익은 안전하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이 의외의 사실에 직면하여 즉시 제5군단을 우익으로 이동시켜 프러시아군단을 저지하게 하고 동시에 그루쉬에게 급사를 보내어 프러시아군의 뒤를 빨리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은 구루쉬에게 전달된 것은 오후 5시 경이었으므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리니전투 이후 와브르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블루헤르는 프랑스군의 미지근한 추격을 얕보고, 고전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웰링톤군을 원조하기 위하여 피로와 부상을 부릅쓰고 나폴레옹의 측면을 공격할 결심을 하고 와브르에 1개 군단만 남겨 놓고 3개 군단으로서 워터루에 향하였다. 한편 나폴레옹의 맹렬한 공격에도 끈기있게 전선을 고수한 웰링톤은 블루헤르의 대병력이 증원되자 18일 오후 8시부터 수세에서 역습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나폴레옹은 대형의 혼란을 바로 잡으려고 가진 노력을 다하였으나 전선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명백해졌으며 6시경에 그는 술트의 강권에 못이겨 패잔병의 무리를 집결하여 프러시아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길없는 광야를 횡단하여 철수 하였다. 그루쉬는 17일에 프러시아군이 와브르와 나무르방면으로 철수하였다는 정보를 얻어 18일 오전 8시부터 자신 없는 행군을 계속하여 와브르방면에서 마침내 프러시아군의 후위대를 포착하였다. 행군도장 워터루방면에서 맹렬한 포성이 들려왔으므로 제 4군단장 제라드는 포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진로를 변경하자고 상신하였으나 그루쉬는 여전히 와브르 방면으로의 행군을 고집하였다. 이리하여 워터루에서 프랑스 제국이 멸망의 심연으로 굴러 떨어져 가고 있을 때 그는 승부없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루쉬는 그 정면에 있던 1개 군단의 프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와브르를 점령할 수 있었으나 실상 그는 나폴레옹의 완전한 파멸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6월 21일 나폴레옹은 파리에 돌아와서 23일에 "......나는 적국이 프랑스에 대해서 갖는 증오의 제물로서 내 자신을 받쳐 홀로 모든 고통을 감수하겠다. 이제 나의 모든 정치적 생명은 끝났으며 내 아들을 [나폴레옹 2세]의 칭호로써 프랑스 황제로 선언한다. 전국민은 일치 단결하여 국가의 독립을 지키라."는 말로 선위선언을 했다. 7월 15일 영선 벨레로폰호는 남태평양상의 고도 센트헤레나로 출발하였다. 그는 거기서 1821년 5월 5일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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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27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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