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자주적 기업활동과 기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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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의 자주적 기업활동과 기업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 론
2.본 론
1)일제시대의 경제상황
2)일제시대의 민족기업
3)민족지도자와 민족기업
4)일제시대의 대표적 기업가
3.결 론

본문내용

은 첫째는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
○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금세기를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상(紳商)으로 존경
받았고,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애국적 민족기업인이다. 유 박사는 어린 몸으로
혼자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까지 나왔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
적으로 이를 이끌어왔으며, 선배들을 도와 독립운동에도 가담한 굳은 의지의
청년이었다.
유 박사는 31세 되던 해 고국에 돌아와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일본인들이 득세
하고 있던 제약업계에서 그들과 대항하면서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근면ㆍ성실,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일에만 몰두했고, 서거시에는 그의 기업ㆍ사재
까지도 사회에 환원하고 간 현대 자본주의의 참정신을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
로 신상이었다.
○ 국가관
1930년대 조회 때마다 전 사원에게 강조된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이며, 실질적
으로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모체가 된 '유한양행의 정신'을 보면
.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보다 못하지 않다.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 유한은 결코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해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기반이 된 사상이고, 유 박사 기업
이념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 사회관
유 박사의 사회관을 그의 어록을 통해 살펴보면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이다."
"양질 × 염가의 제품 생산, 이것은 기업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
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위의 유 박사의 말들에서 그가 생각했던 기업과 사회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
난다. 기업의 소유주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며 개인은 그것을 단지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그의 생각은, 그의 사회관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단면
일 것이다.
사유재산제도 아래 유 박사는, 일제시대에 이미 개인 소유 회사에서 주식회사
로 개편함으로써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자신의 이념을 실행에 옮겼다. 1936
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주식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공로
주로 당시 액면가의 10% 정도 가격으로 분배하였다.
○ 기업관
유 박사의 기업관을 한마디로 한다면, 그의 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은 이
윤만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그 구성원의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즉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라는
상호유기적 결합체로서의 기업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가지면 성실, 건강한 이윤관, 기업은 사회의 소유라는 의식,
경영자와 종업원에 대한 각별한 의식들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 특히 한국에서 기업은 거의 소유주 개인
이 소유권을 행사하고 이를 자기 후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그
러나 유 박사는 그의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서 그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그가 1971년 3월11일 서거한 이후 다음 달인 4월8일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자
신의 손녀를 위한 학자금으로 자기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당시 환율로 3백만원
에 해당하는 1만달러를 마련하고, 딸에게는 유한중 × 공고 내의 묘소 및 주면
대지 5천평을 상속하되 '유한동산'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게 해 줄 것과, 자신의 소유 주식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
신탁기금'에 기증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결 론
일제시대의 자주적 기업활동과 기업가는
우리나라의 내재적 발전양상을 보여준다.
일본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자본주의적 경제논리로 지배할
수 있는 역량이 미흡했다. 그에 따라 무력을 동원한 위협적인 방식으로 우리나
라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억압했다. 그리고 봉건적인 지주제를 유지·발전시킴
으로써 우리나라를 일본의 원료 공급지·상품시장으로 지배하려고 했다. 이에 반
발한 한국의 부르주아 세력들이 1919년 3·1운동을 일으켰고 민중들도 이에 호
응하여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근대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식민지 경영비용 대부
분이 조선인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 조달되었으며 '근대화'의 내용도 조선
을 식민통치에 편리하게 변모시키는 부분에 집중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화하여 근대화시켜주었다는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
오히려 조선후기에 이미 우리경제는 시장이 출현하여 물물교환의 단계를 넘어
선 상품과 화폐의 교환이 이루어진 시장 지향적 상품생산체제의 특징을 보였고,
광작과 전주전객제를 통해 소유권중심으로 이동하였고 민영수공업의 발달과 선
대제의 출현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이루어 졌으며, 광작과 더불어 임대차
농민이 증가하여 도조권을 바탕으로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자계급이 성장하여 발전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적
이고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행동양식의 면도 보여주는 등 현대 자본주
의의 특징을 띄고 있어서 근대사회로의 발전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 일본의 식민지하에서도 회사령을 통한 조선 자본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민족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느낀 민족지도자들이 민족기업을 육성하고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경제적인 독립을 꾀하고자 노력했으며 선진문물이
나 교육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주적인 능력을 배양하여 발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노
력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근대적 발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통한 발전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사회적·경제적 분야
에서 자주적인 활동을 펼쳐온 내재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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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01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6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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