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계몽운동기의 주도세력
3. 정치개혁운동기의 주도세력
4. 권력개편운동기의 주도세력
5. 독립협회운동의 지지기반
6. 맺음말
2. 계몽운동기의 주도세력
3. 정치개혁운동기의 주도세력
4. 권력개편운동기의 주도세력
5. 독립협회운동의 지지기반
6. 맺음말
본문내용
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전통적지배체제의 말단 지배집단 출신으로서 근대개혁의 실무자로 성장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독립협회 안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현실의 정치구조를 인정하는 가운데 신문발간을 통해 계몽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내정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것을 추구했던 흐름이었다.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개화 초기부터 정부의 개혁사업에 말단으로 참여하였거나 권세가의 측근세력으로서 성장해 온 사람들이었다는 점과 영어를 매개로 성장해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초기 개화파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와 결합하였던 윤치호와 조선후기 이래로 성장해왔던 중인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아직까지는 전통적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남궁억 등의 상촌인(上村人) 출신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한글을 전용하였던 <<독립신문>>과 국한문 혼용체로서 발행되었던 <<황성신문>>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즉 전자의 경우 계몽의 주체는 개화파 관료이고 계몽의 대상은 평민층이라고 인식하였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 근대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한자문화에 익숙해 있으며, 또한 그를 통해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유지해왔던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경수, 고영근, 정교, 이건호로 대표되는 세력은 갑오개혁 이전에는 주로 민씨 척족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해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갑오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권력의 중심에 근접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일본인과의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권력 자체를 장악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달성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오개혁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신식 교육기관이나 관직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이 세력을 지지하였다는 점은 당시 청년층의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근거로서 추후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동안 갑신정변과 갑오개혁과 같이 고위관료들을 중심으로 협소한 주도세력을 가지고, 또한 외세의 무력지원을 배경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근대개혁을 진행시키겠다고 했던 한계가 독립협회 운동에 와서 상당히 극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주도세력이 양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근대개혁의 방향과 일치할 수 있는 지향을 가진 세력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 비록 외세의 간접적인 지원이 있기는 하지만 시민층들을 광범하게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발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직까지는 스스로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정치집단을 형성하지 못한 채, 구시대적 개화파 관료들에게 자신들의 대표성을 위임하는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립협회 운동은 한국근대 변혁운동의 주체가 개화파 관료에서 신흥 부르주아 세력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개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독립협회 안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현실의 정치구조를 인정하는 가운데 신문발간을 통해 계몽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내정개혁을 통해 근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것을 추구했던 흐름이었다.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개화 초기부터 정부의 개혁사업에 말단으로 참여하였거나 권세가의 측근세력으로서 성장해 온 사람들이었다는 점과 영어를 매개로 성장해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초기 개화파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와 결합하였던 윤치호와 조선후기 이래로 성장해왔던 중인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아직까지는 전통적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남궁억 등의 상촌인(上村人) 출신들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한글을 전용하였던 <<독립신문>>과 국한문 혼용체로서 발행되었던 <<황성신문>>의 차이로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즉 전자의 경우 계몽의 주체는 개화파 관료이고 계몽의 대상은 평민층이라고 인식하였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 근대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한자문화에 익숙해 있으며, 또한 그를 통해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유지해왔던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안경수, 고영근, 정교, 이건호로 대표되는 세력은 갑오개혁 이전에는 주로 민씨 척족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해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갑오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권력의 중심에 근접한 경우도 있었다. 주로 일본인과의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권력 자체를 장악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달성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오개혁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신식 교육기관이나 관직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이 세력을 지지하였다는 점은 당시 청년층의 현실인식을 보여주는 근거로서 추후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동안 갑신정변과 갑오개혁과 같이 고위관료들을 중심으로 협소한 주도세력을 가지고, 또한 외세의 무력지원을 배경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근대개혁을 진행시키겠다고 했던 한계가 독립협회 운동에 와서 상당히 극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주도세력이 양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근대개혁의 방향과 일치할 수 있는 지향을 가진 세력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 비록 외세의 간접적인 지원이 있기는 하지만 시민층들을 광범하게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발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직까지는 스스로를 대변해줄 수 있는 정치집단을 형성하지 못한 채, 구시대적 개화파 관료들에게 자신들의 대표성을 위임하는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독립협회 운동은 한국근대 변혁운동의 주체가 개화파 관료에서 신흥 부르주아 세력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나타난 개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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