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본인성씨의 역사와 시조
2. 본인성씨에서 배출된 역사적 인물
3. 본인성씨와 관련된 유적
4. 본인성씨의 현황
2. 본인성씨에서 배출된 역사적 인물
3. 본인성씨와 관련된 유적
4. 본인성씨의 현황
본문내용
향교 명륜당에 수장되었다. 그 후 1841년에 화재로 유실된 것을 광주 목사 조철영(趙撤永)이 중각(重刻)하면서 빠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모두 18편이 되었다. 현존 목판각은 1판 2면의 양면판으로 1판에 4면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34cm,세로20cm, 두께4cm내외로 일정하지 않다.
[4] 본인성씨의 현황(인구, 집성촌)
(1) 박씨의 관향별 가구와 인구수 (2003년 통계청 자료)
관 향 별
가 구 수
인 구 수
전 국
1,215,918
3,895,121
밀 양 (밀성)
946,307
3,031,478
반 남
43,300
139,438
함 양
38,788
123,688
순 천
27,209
87,631
무 안
24,746
78,817
죽 산
16,816
53,489
고 령
12,301
39,239
춘 천
5,274
16,860
(2) 집성촌
① 보온군 마로면 변둔리(卞屯里)
변둔리는 멋두니라고도 불리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는골(細洞)을 병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로면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한중리, 서는 갈전리, 남은 옥천군 청산면, 북인 소여리와 접하고 있다.
멋두니는 밀양 박씨의 집성촌으로 시루산 꼭지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이장 박해영씨(36), 노인회장 박인하
옹(70), 부녀회장 임추자씨(47), 새마을지도자 윤태호씨(48)를 포함해 37가구에 138명이 한가족처럼 살고 있다. 이중 25호가 밀양 박씨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마다 10월이면 마을 뒷산 시루봉 아래에 있는 제시에서 시사를 지내고 있다.
② 눌곡리(訥谷里)
눌곡리는 영해 박씨 목사 공파의 집성촌이다. 현재 마을의 70여 가구 중 영해 박씨가 60가구 정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박혁거세의 45세손인 박충립(朴忠立)이 옥천군 안남에서 이주해 오면서 처음 박씨 집성촌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후손들이 계속 번창해 현재는 61세손까지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영해 박씨 목사 공파 종중에서 감모사(感慕祠)를 건
립해 5대조 이상 1백 60여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첫 번째 일요일에 시사를 모시고 있다.또한 눌곡리에는 지방기념물 제 28g로 지정된 풍림정사(楓林精舍)가 있다. 풍림정사는 조선말기의 성리학자인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며 저술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72년에 건립한 목조와가(瓦家)로 전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집으로 현재 이곳에 박문호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③ 외삼포 2리
외삼포 2리는 면소재지인 성산과의 사이에 홍천강이 흐르고 있어 오랫동안 가깝고도 먼 생활을 해 왔으나 1974년에 새마을 사업으로 완공된 성포교에 이어 1986년 마을 앞에 120m의 교량이 가설됨으로써 주민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원활한 교통을 가능케 했다.
성포교 다리가 준공되기 전에는 나룻터가 있어 배를 이용하여 성산쪽으로 건너 가거나 물이 적은 가을철에는 섶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인조23년(1645년)에 건립된 완산이씨열녀문(完山李氏 烈女門)이 1978년 말끔히 보수되어 자리하고 있다. 밀성박씨, 춘천 박씨 집성촌이기도 하였다.
④ 어모면 군자리(君子里) 하덕마을
하덕 마을은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서산정씨가 살았다고 전해 오는 것을 미루어 보면 오래된 고장으로 보인다. 1594년 밀양박씨 대현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조모를 모시고 금산에 서 이주하였고, 1894년 정선전씨 인우가 영동에서 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
으나, 박씨 집성 촌을 이루었다.
원당은 1946년 밀양박씨 희대가 덕림에서 이주해서 마을을 개척하여 형성되었다.
군자리는 하덕. 평촌. 덕림. 원당의 4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어모현 에 속하였다. 1416년 김산군 천하면이 되었고 1920년 천하면, 천상면을 합하여 아천면이 되 면서 하덕. 평촌. 덕림을 통합하여 군자동이라 하다가,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통합하 여 어모면이라 칭하고 그 관내에 속하였다.
⑤ 영주 무섬마을과 선비촌
하회마을을 빼닮은 물도리동. 영주에서 흘러온 영주천과 예천을 비껴 흐르는 내성천이 마을 앞에서 만나 350도 정도 마을을 돌아간다. 강 건너 앞산은 소백산 줄기,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로 풍수상 매화가지에 꽃이 핀다는 매화낙지라고 한다. 마을엔 예안 김씨와 반남 박씨 두 집안 사람들이 살고 있다. 1666년 반남 박씨가 터를 잡았고 이어 250여 년 전 박씨 문중과 혼인한 예안 김씨 집안이 들어왔다. 모두 50가구 중 100년 이상 된 고옥만 16동. 도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된 것이 9동이나 된다.
⑥ 달성군 묘리
달성군 묘리에 가면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박씨의 집성촌이 있다. 등실등실한 골기와집 30여호가 처마를 맞대고 있는 이 마을은 박팽년의 충의정신을 깊이 되새기게 하는 곳으로 영화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사육신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까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손이 있었으니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다. 박팽년의 일가가 형벌을 받을 무렵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임신중이었다.
나라에서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비로 보내라는 엄명이 내렸다. 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부인의 아들과 바꿨다. 박씨 집안의 혈손을 맡은 이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숨어 살면서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키웠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란 뜻으로 박비라고 불렀다. 박비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성종은 사육신들이 옳은 일을 했다는 평가를 하고 박비(박일산)를 사면했다.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정착한 자리가 바로 이 곳 마을이다.
그 후손들은 육신사를 세워 사육신 여섯명의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다. 육신사는 1927년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81년 완공한 건물로 외삼문, 삼층각, 숭절당 등이 들어서 있고,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보물 제 554 호)이 눈길을 끌고 있다.
[4] 본인성씨의 현황(인구, 집성촌)
(1) 박씨의 관향별 가구와 인구수 (2003년 통계청 자료)
관 향 별
가 구 수
인 구 수
전 국
1,215,918
3,895,121
밀 양 (밀성)
946,307
3,031,478
반 남
43,300
139,438
함 양
38,788
123,688
순 천
27,209
87,631
무 안
24,746
78,817
죽 산
16,816
53,489
고 령
12,301
39,239
춘 천
5,274
16,860
(2) 집성촌
① 보온군 마로면 변둔리(卞屯里)
변둔리는 멋두니라고도 불리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는골(細洞)을 병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로면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한중리, 서는 갈전리, 남은 옥천군 청산면, 북인 소여리와 접하고 있다.
멋두니는 밀양 박씨의 집성촌으로 시루산 꼭지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이장 박해영씨(36), 노인회장 박인하
옹(70), 부녀회장 임추자씨(47), 새마을지도자 윤태호씨(48)를 포함해 37가구에 138명이 한가족처럼 살고 있다. 이중 25호가 밀양 박씨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마다 10월이면 마을 뒷산 시루봉 아래에 있는 제시에서 시사를 지내고 있다.
② 눌곡리(訥谷里)
눌곡리는 영해 박씨 목사 공파의 집성촌이다. 현재 마을의 70여 가구 중 영해 박씨가 60가구 정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박혁거세의 45세손인 박충립(朴忠立)이 옥천군 안남에서 이주해 오면서 처음 박씨 집성촌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후손들이 계속 번창해 현재는 61세손까지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영해 박씨 목사 공파 종중에서 감모사(感慕祠)를 건
립해 5대조 이상 1백 60여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첫 번째 일요일에 시사를 모시고 있다.또한 눌곡리에는 지방기념물 제 28g로 지정된 풍림정사(楓林精舍)가 있다. 풍림정사는 조선말기의 성리학자인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며 저술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872년에 건립한 목조와가(瓦家)로 전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집으로 현재 이곳에 박문호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③ 외삼포 2리
외삼포 2리는 면소재지인 성산과의 사이에 홍천강이 흐르고 있어 오랫동안 가깝고도 먼 생활을 해 왔으나 1974년에 새마을 사업으로 완공된 성포교에 이어 1986년 마을 앞에 120m의 교량이 가설됨으로써 주민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원활한 교통을 가능케 했다.
성포교 다리가 준공되기 전에는 나룻터가 있어 배를 이용하여 성산쪽으로 건너 가거나 물이 적은 가을철에는 섶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인조23년(1645년)에 건립된 완산이씨열녀문(完山李氏 烈女門)이 1978년 말끔히 보수되어 자리하고 있다. 밀성박씨, 춘천 박씨 집성촌이기도 하였다.
④ 어모면 군자리(君子里) 하덕마을
하덕 마을은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서산정씨가 살았다고 전해 오는 것을 미루어 보면 오래된 고장으로 보인다. 1594년 밀양박씨 대현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조모를 모시고 금산에 서 이주하였고, 1894년 정선전씨 인우가 영동에서 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었
으나, 박씨 집성 촌을 이루었다.
원당은 1946년 밀양박씨 희대가 덕림에서 이주해서 마을을 개척하여 형성되었다.
군자리는 하덕. 평촌. 덕림. 원당의 4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어모현 에 속하였다. 1416년 김산군 천하면이 되었고 1920년 천하면, 천상면을 합하여 아천면이 되 면서 하덕. 평촌. 덕림을 통합하여 군자동이라 하다가, 1934년 아천면과 구소요면을 통합하 여 어모면이라 칭하고 그 관내에 속하였다.
⑤ 영주 무섬마을과 선비촌
하회마을을 빼닮은 물도리동. 영주에서 흘러온 영주천과 예천을 비껴 흐르는 내성천이 마을 앞에서 만나 350도 정도 마을을 돌아간다. 강 건너 앞산은 소백산 줄기,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로 풍수상 매화가지에 꽃이 핀다는 매화낙지라고 한다. 마을엔 예안 김씨와 반남 박씨 두 집안 사람들이 살고 있다. 1666년 반남 박씨가 터를 잡았고 이어 250여 년 전 박씨 문중과 혼인한 예안 김씨 집안이 들어왔다. 모두 50가구 중 100년 이상 된 고옥만 16동. 도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된 것이 9동이나 된다.
⑥ 달성군 묘리
달성군 묘리에 가면 사육신의 한 분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순천박씨의 집성촌이 있다. 등실등실한 골기와집 30여호가 처마를 맞대고 있는 이 마을은 박팽년의 충의정신을 깊이 되새기게 하는 곳으로 영화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사육신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일가 친척까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손이 있었으니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다. 박팽년의 일가가 형벌을 받을 무렵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임신중이었다.
나라에서는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관비로 보내라는 엄명이 내렸다. 부인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부인의 아들과 바꿨다. 박씨 집안의 혈손을 맡은 이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숨어 살면서 지극정성으로 아들을 키웠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란 뜻으로 박비라고 불렀다. 박비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성종은 사육신들이 옳은 일을 했다는 평가를 하고 박비(박일산)를 사면했다.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묘골에 정착한 자리가 바로 이 곳 마을이다.
그 후손들은 육신사를 세워 사육신 여섯명의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다. 육신사는 1927년 기초공사를 시작하여 81년 완공한 건물로 외삼문, 삼층각, 숭절당 등이 들어서 있고,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보물 제 554 호)이 눈길을 끌고 있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