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성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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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성풍속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입을 막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춘화는 18∼19세기 서울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의 영향으로 소비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자체 제작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방을 중심무대로 하여 발달했던 유흥문화의 일종인 춘화일지라도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우리만의 정서를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행하던 조선의 춘화는 구한말에 이르러 급속히 퇴락하고 만다. 이 무렵부터 일본 창녀의 진출과 도시 매음이 크게 번창하면서 일본의 값싼 춘화류가 상당량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춘화는 자극적인 음란성만이 강조되어 예술적 품격은 사라지고 저질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예술적 가치를 상실하고 단순한 도색물로서의 의미 외에는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없게 될 때, 춘화의 역사적 가치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차. 민간 신앙으로 살펴본 성
조선시대에는 사직신(社稷神) 숭배를 각 지방에서 행하였는데, 사직신을 위한 연중 제사 의례 때에 신물로 목제 남근을 깎아 붉은 칠을 하고 푸른 글씨를 써서 봉납하였다는 부근(付根) 풍습의 기록이나 부근당의 기록들이 보인다. 여기서 '부근'이라는 명칭은 부군(府君)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으나 남성 성기인 남근과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부근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중종 12년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각사 안에 모두 신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풍습이 있는데 부근이라 하였으며 행해온 지 이미 오래이므로 능히 혁파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헌부(憲府)가 먼저 지정을 불사르고 각사에 관문을 보내어 모두 불사르게 하여 그 제사를 금하니 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양현고 안에 부근의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대비가 내수사에게 양현고의 부근신에 양근 신물을 바치게 하였다.』
사신은 토지신을 말하며 직신을 오곡신을 말하는 것이기에 농경문화의 시작에서부터 사직신 숭배는 있었고 이러한 사직신 숭배에 부근 습속이 끼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부군당이라 불리는 당사(堂祠)를 각 지방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과 여러 외국의 고금사물을 백과사전식으로 편찬한 책이다. 총 60권
에는 민간뿐만 아니라 국가와 궁중에서도 신앙되었다는 부군당과 관련하여 목제 남근을 당사 안에 걸었다는 사설이 전하고 있다.
『음사(淫祠) 중 지금 서울의 각사에 신사가 있어 부근당이라 한다. 잘못 부근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 번 제사에 드는 돈은 누백금에 이른다. 부근이라 함은 많은 목형 음경을 만들어 이를 걸었으니 음탕하기 이를 데 없다. 혹은 말하길 부근이란 관사의 뿌리로서 목경을 거는 뜻은 사람의 뿌리가 신경이기에 그에 따른 것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이수광이 지은 책으로 천문, 지리 등 다양한 항목을 고서에서 인용하여 설명한 책
이나 무라야마 지쥰
) 일본의 민속학자이며 종교학자. 그의 저서는 우리 나라 민간 신앙을 전반에 걸쳐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조사 보고서이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효율적인 식민지 정책을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
의 《조선의 무격》등에도 언급되어 있어 부근 숭배 곧 남성 성기 숭배 신앙이 과거부터 줄곧 계속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불사의 종교적 관행으로 속리산 법주사에서는 해마다 설날에 신자들이 목제 남근을 깍아 산정 신당에 봉납하는 '송이(松耳)놀이'리는 풍습이 있었다. 송이란 곧 남근을 의미하는 불교적인 은어라고 한다. 이 놀이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 조선 성종의 명을 받들어 노사신 등이 《대명일통지》를 본 떠 조선 각도의 지리, 풍속, 그 밖의 특이할만한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에도 전하고 있어 이러한 풍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자재천왕사가 속리산정에 있는데 그 신은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로 내려온다. 산중 사람들이 신을 즐겁게 맞이하기 위하여 신사를 지으니 45일간 머물다 돌아간다.』
이와 같은 송이놀이와 관련해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를 보면 성기 신앙의 풍속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온 사중(寺衆)이 모두 모여서 제사를 행했는데, 목봉을 양경을 형용을 만들고 거기에 붉은 칠을 하여 그것을 들고 춤을 추며 신을 위안했다.』
이렇듯 목제 남근을 사용한 의례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으며 그 유래 또한 매우 길었음을 알 수 있다.
맺음말
지금까지 선사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는 각종의 그림과 자료들을 개괄적으로나마 엮어서 한국의 성문화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까지 언급한 자료들이 한국의 성을 대표하는 것들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나름대로의 각종의 자료를 선별하여 살펴봄으로써 지금까지 과거로부터 유교의 억압된 성문화 우리의 일상에서 잘 모르고 있던 조상들의 성문화를 살펴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성은 인류가 살아나가는 데 있어 유희와 쾌락으로서의 기능과 항시 작용하지만, 무엇보다도 종족보전이라는 본능이 함께 있기에 언제나 우리들의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터부의 대상이면서도 언제나 관심이 가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묘한 것이기에 조금만 잘못되어도 쉽게 왜곡되기 쉬운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왜곡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보고서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성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살펴보았다는 것이 참으로 뜻 있는 일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여성신문사, 1998
이종철 외, 《성, 숭배와 금기로 본 문화》대원사, 1997
정성희,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정연식, 《일상으로 보는 조선시대 이야기》, 청년사, 2001
강명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가와무라 미나토, 《말하는 꽃 기생》, 소담 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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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8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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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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