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와 김소진의 열린사회와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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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칼포퍼와 김소진의 열린사회와 적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적들』
1. 사회적 배경

2. 내용 요약

3. 주장 ( 포퍼가 지향하고자 한 열린 사회 )
비교!!《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본문내용

을 얻었다.
김소진의 문학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이 대부분 아버지에게 눈물겹게 바쳐지고 있는 것도 그의 문학이 아버지와의 싸움과 화해의 전말에서 그 동력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에게 아버지는 가족사의 범주를 넘어 우리 현대사와 민중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족을 이북에 두고 월남한 아버지는 바로 좌우, 남북 이념 대결의 희생자였다. 성장기의 작가는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력을 증오했지 만, ‘혁명’의 80년대를 20대로 관통하면서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삶을 자기의, 동시대인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가난한 성장기를 보낸 70∼80년대의 서울 미아리 삼양동 달동네는 그의 문학적 터전이었고 , 그 달동네의 ‘기찻집’과 ‘장석조네 사람들’은 민중들의 생활과 정 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 흔해빠지고 때론 악다구니로 때론 비굴한 군상들로 등장하는 서민들 속에서 그는 인간과 역사를 증거하고 있었고, 인간애와 이념에 투철하고자 했던 저 80년대를 환멸의 기억으로 밀어내 버리려는 90년대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이념적 경향성과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었다. 요컨대 그의 문학의 본령은 인간 과 역사에 대한 열정과 진실함이었다.
문학평론가 서경석씨는 이 무렵의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소진의 문학은 점차 이른바 ‘총체성’을 담지해가고 있다. 이념의 과잉과 상실의 시대로 인식되던, 그리하여 다소 윤리적 시각에서 바라보던 80년대와 90년대를 민중적 삶이 지탱해온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포섭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장석조네 사람들로 대표되는 서민 대중들의 ‘쑥부쟁이’ 같은 삶, 그러나 그 속에서 피어나는 ‘달개비꽃’ 같은 희망이 그를, 그의 문학을 키운 토양이었다. 김소진은 우리 당대를 고민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의 본질을 이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 역사의 차원에서 복원해놓은 90년대 최초의 작가이다.”
민중의 터전에서 우리말 진수성찬 마련
김소진 문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는 문학 수업 시절 우리말사전을 “씹어 먹어가며” 공부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노력을 통해 그 단어 하나하나는 작품 속에서 살아있는 언어로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들은 거개가 이런 우리말의 한바탕 잔치였다. 그것은 90년대 동년배 작가들뿐 아니라 앞으로의 작가들에게도 쉽게 기대하기 어려운 미덕이었다.
그러나 개별적 자아와 가벼운 상상력이 넘쳐나는 감각주의의 물결이 80년대를 서둘러 휩쓸어가기 시작할 90년대 초에 홀연히 “낡은” 사실주의를 들고나선 그의 이런 ‘고전적’ 작풍과 작의는 철지난 유행가의 리바이벌로 치부되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깃발은 외로웠고, 상업주의적 각광은 애시당초 그와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시선을 돌리는 대신 스스로에게 시선의 예각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95년 전업작가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의 소설도 한발씩 90년대라 는 ‘당대의 현실’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좀더 자신의 문학의 본질을 자기의 시대에서 드러내보고자 했다.
95년 초 김소진은 일산으로 가는 경의선 밤열차 안에서 문득 “더 늦기 전에 내 문학과 정면으로 싸우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뒤 그의 결심은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소설쓰기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문학이 속된 말로 ‘장사’가 잘 안 되는 상품임을, 그리하여 그 의 문학인생이 앞으로도 험로 일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 회로를 파는 대신 주어진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리고 1년반, 그는 왕성한 생산력을 보였다. 죽기 불과 몇 달 전 그는 약간의 취기를 빌려 “이제 그만 기억의 창고 속에서 나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 가 자기 문학의 한 매듭을 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손경목씨는 그의 마지막 발표작이었던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그의 시선의 변화를 예감하는 상징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이 소설은 김소진의 문학적 고향인 삼양동 달동네가 재개발로 사라지게 되면서 그도 이제 이 동네를 떠나고 있음을 깨닫는 줄거리다. 삼 양동 시대의 마감은 그의 문학이 이제 새로운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려 하 는 것으로 읽혔는데, 그만 그 지점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90년대의 감수성은 분단과 민족 그리고 민중이란 저 무겁디 무거운 주제와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그의 문학은 아쉽게도 미완의 종지부를 강요당했다. 그가 문학으로 이룬 성취는 그가 뿜어내고 있던 뜨거운 가능성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므로 그가 한국문학사에 어떻게 자리 매김 될지 조차도 미지수로 남게 만들었다. 그의 너무 이른 죽음은 어쩌면 짧았던 문학적 과거마저도 앗아갈지 모른다.
당당한 문학에 영원한 젊은 소설가로 남아
문학평론가 서영채씨는 “그는 아직 많은 이야기를 남겨두고 있는 작가였다. 과거의 김승옥이나 이청준처럼 그도 늦깎이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 다. 하지만 그는 진짜 자기 말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이었다. 남긴 작품만으로 볼 때, 그는 90년대의 핵심적 감수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90년대 정 서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개성적인 작가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며 아쉬워했다.
이제 김소진은 영원히 젊은 소설가로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소설 속의 ‘장석조네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역마다 한 무리 씩 부려놓고 멀어져가던 그 귀갓길 열차처럼, “더 늦기 전에” 라고 조 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문학에의 결의를 토로하던 그의 목소리도 점차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질 것이다. 90년대라는 혼란스런 카니발이 끝난 뒤 사위를 침착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될 때쯤이면, 우리의 문학사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게 될런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는 정정당당했지만 운명은 처음부터 그에게 너무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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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1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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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79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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