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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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야구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①야구의 개념과 기원
②야구경기의 한국 도입과 변천사
.
.
.
.
.
.
. 결론

본문내용

로무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8년 베네수엘라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 강속구를 자랑했던 이상윤은 어깨 부상 탓에 7승5패로 미미한 성적에 그쳤으나 원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 일약 20승을 올리며 해태를 우승으로 이끄는 에이스로 성장했다. 1982년에 6승7패1세이브에 머무른 방수원도 1984년 5월 5일 삼미를 상대로 한국 프로야구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투수가 된다.
박철순과 백인천이라는 '해외파 슈퍼스타들을 뒤따르는 원년 스타들은 김봉연, 김성한, 김일권 등 해태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마추어 시절 대표적인 홈런타자로 각광을 받았던 김봉연은 22개의 홈런을 터뜨려 백인천 김준환(이상 19개)를 제치고 원년 홈런 왕에 올랐다. 이는 실업야구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79년이래 4년연속 한국의 홈런 왕으로 자리매김하는 셈이었다. 인기면 에서는 김봉연이 해태선수 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실질적인 팀공헌도에서는 김성한이 김봉연을 앞섰다. 한국프로야구는 엄연히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김성한은 마운드에 올라가 던지면서도 직접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고 투수로 뛰지 않는 날에는 지명타자나 3루수를 맡으며 전게임(80)에 출장했다. 이런 1인2역을 하면서 김성한은 타석에서 타율 0.305, 홈런 13개, 타점 69개를 올려 타점왕 타이틀을 잡았고 투수로서는 10승5패1세이브로 다승 7위(팀내 1위), 방어율 2.89로 6위(팀내 1위)를 마크했다.
특히 5월 15일 삼성과의 광주경기에서는 5회까지 2­0으로 뒤지고 있던 게임에 6회부터 구원등판, 삼성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7회말 동점홈런을 터뜨리고 연장 11회말에는 끝내기 우전적시타를 터뜨려 3­2 승리를 낚는 1인2역을 해냈다. 김성한이 타점왕에 오른 데에는 발빠르고 출루율이 높은 김일권이 앞에서 많은 득점기회를 열어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천부적인 야구센스와 스틸의 재능을 가진 김일권은 대표팀을 자퇴하는 우여곡절 끝에 해태 유니폼을 입은 후 65게임에 출장, 53개의 도루를 뽑아 초대 도루왕에 올랐다.
아마추어 시절 투타 양면에서 일본의 하라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용희는 롯데 입단 후 허리부상으로 고전하며 63게임에 출전, 타율 0.284에 11홈런에 그쳐 이름에 비해 뒤처지는 활약을 보였으나 7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 3차전에서 행운의 7회말 신경식­윤동균­김우열 등 OB의 세 주자로 베이스를 채우고 유종겸의 초구를 통타, 만루홈런을 터뜨림으로써 미스터 올스타로 뽑히는 기쁨을 누렸다. 팀메이트 김용철도 3차례의 올스타전을 통해 3개의 홈런을 때려냈으나 김용희는 1차전에서 동군 3루수로서 미기상을 탄 데 이어 2차전에서는 1, 8회초 솔로홈런을 터뜨렸던 것이 MVP 수상의 밑바탕이 됐다.
9)우리 야구의 나아갈 방향
우리 야구는 해를 거듭하며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수협 선수협(선수들의 권리를 찾자는 계기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노조’와도 같은 의미이다.) 파동으로 이번 해 야구 시즌이 열리지 못할 위기에 처해져 있었으나 결국 KBO가 이를 인정해 결국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많은 선수들이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하였고 선수 생활직을 강탈당하는 사건도 생겨 많은 진통을 겪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선수협이 결성됨으로써 선수들은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파동으로 인해 진통을 겪었으나 고착화 단계에 있고 과거에는 극소수의 선수만이 진출하던 해외진출도 야구의 발전과 함께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화려한 실력의 향상과 함께 스타들의 대거등장과 용병의 가입으로 질적인 향상을 거듭하였고 그로 인해 관중과 그 규모도 커지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경기의 양적질적인 향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과 관중들의 의식은 아직도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노예계약적인 조항이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관중들은 아직도 고성과 음주 그리고 오물 투척 등 우리 나라 야구장의 그물 망은 필요이상으로 두껍고 시야를 가린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를 보면 그물 망이 없으며 담 또한 아주 낮아서 보기가 편하다. 우리 나라의 그물 망이 너무 높다는 것은 우리 나라 야구 협회(KBO)의 잘못된 설정도 있지만 우리 나라 관중들의 의식(연고지 주의가 결과를 낳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밝힌 이런 행동들 때문에 우리 나라의 그물 망의 높이를 조절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며 어쩌면 영원히 그대로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의 몰상식한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야구의 역사가 해를 거듭하며 발전하고는 있지만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는 한 발전은 여기서 그칠 뿐만 아니라 퇴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수들의 권리 보장과 관중의 의식 성장은 야구가 더 이상 경기를 관람하고 즐기는 수준에서 이를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국민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하나의 대변자적인 스포츠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야구는 이런 질적, 양적인 발전과 그 밑바탕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성장될 때 진정한 스포츠로 거듭날 것이다.
3. 결론
우리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해온 야구의 역사를 프로야구를 중심으로 정리 해 보았다. 우리 야구의 역사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같이 해오며,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스포츠보다 중요한 면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밝힌바 있듯이 경기의 질적양적 발전은 해를 거듭해 오며 성장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 깔린 문제들은 빨리 해결되어야 하는 시급한 문제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날이 올 때우리 야구는 새로운 의미를 지닐 것이며 또한 세계적인 야구강국의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국민들과 우리 역사와 희노애락을 같이 해온 야구. 어쩌면 우리 나라 야구는 우리 나라만의 특수성을 가진 한국만의 야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참고 문헌
《한국야구사》, 대한야구협회
《웅진대백과사전》, 야구편
www.naver.com 검색어에서 ‘야구’ 입력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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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9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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