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고대 일본
◈ 아스카시대
◈ 불교 전래와 발전에 기여함.
◈ 유교의 전파
◈ 하쿠호(白鳳)문화
◈ 기마민族 일본국가정복설과 비판
◈ 日국보「백제관음상」「목조반가사유상」
◈ 나라 궁궐터서 신라 안압지 본뜬 연못 발굴
◈ 백제의 왜국 통치 300년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 고대 일본 사서 편찬과 백제인의 참여
◈ 일본 천지왕의 신백제 꿈
◈ 쇼토쿠태자
◈ ‘日왕실 뿌리는 경북 고령’ 쓰쿠바대 마부치 교수
◈ 나량 평안 시대
◈ 아스카시대
◈ 불교 전래와 발전에 기여함.
◈ 유교의 전파
◈ 하쿠호(白鳳)문화
◈ 기마민族 일본국가정복설과 비판
◈ 日국보「백제관음상」「목조반가사유상」
◈ 나라 궁궐터서 신라 안압지 본뜬 연못 발굴
◈ 백제의 왜국 통치 300년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 고대 일본 사서 편찬과 백제인의 참여
◈ 일본 천지왕의 신백제 꿈
◈ 쇼토쿠태자
◈ ‘日왕실 뿌리는 경북 고령’ 쓰쿠바대 마부치 교수
◈ 나량 평안 시대
본문내용
겨 볼 부분" 이라며 "특히 일본서기의 사료적 가치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으며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다" 고 말했다.
◈ '日왕실 뿌리는 경북 고령' 쓰쿠바대 마부치 교수
중앙일보 1999년 6월 30일 고령 = 송의호 기자
"일본 왕의 조상이 살았던 고천원 (高天原) 은 하늘이 아닌 경북 고령 (高靈) 땅입니다. 적어도 일본서기 (日本書紀) 와 고사기 (古事記) 기록이 가공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
29일 경북 고령에 세워진 '고천원 고지' (高天原 故地) 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일본 쓰쿠바대학 마부치 가즈오 (馬淵和夫.81) 명예교수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나의 학설을 받아들인 것에 큰 용기를 얻는다"
고 말했다.
마부치 교수는 일본 고대어 분야의 권위자. 그는 일본 고어를 연구하다 고구려.가야어로 관심의 영역을 넓혔고 10여년 전쯤 고천원의 수수께끼를 푸는 연구에 매달렸다.
그의 연구 토대는 일본 최고 (最古) 의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고사기에서 천손 (天孫) 이 한국에서 건너왔음을 추론했고 일본서기에서는 신라와 가까우면서도 서방에 있는 산중분지라는 지역이 고령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이같은 학설을 4년 전 '고천원 고지' 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가야대 이경희 (李慶熙.75) 총장은 지난해 그의 논문을 읽고 고령땅이 고천원임을 알리는 표석을 학교 안에 세우기로 했다.
마부치 교수는 제막식에 일본 학계 인사 60여명 등 5백여명이 참석하고 일본 왕실의 한 관계자가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를 희망한다" 는 축전을 보내온 것에 고무된 표정이었다.
"고천원 고지가 가야어 연구를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한.일간 묻혀 있는 고대사도 더 많이 풀렸으면 해요. "
◈ 奈良 平安 시대
ㅇ7C 후반 백제 고구려의 멸망시 이주민 (최대의 이주민 물결)
ㅇ8C 후반∼9C 통일 신라 내부의 사회적 모순에 따라 다시 이주 집단.
ㅇ663년 일의 백제 구원군이 백촌강 싸움서 패배. 665 백제인 관위 수여. 후대(70여명) 大化改新(645) 후의 왕조의 내실화 도모를 위한 일련의 정책
ㅇ8C일본 신라 ; 공적 사절 15회, 신라 일본 ; 공적 사절은 21회 그러나 공적 외교 관계는 779년 이후 끊어짐. 그 뒤의 관계는 규슈의 大宰府중심의 사적 교섭과 무역관계(장보고 등, 圓仁의 입당 구법 순례기에 잘 나타남)
*大宰府(다자이후) : 백제가 망하자 齊明여왕의 뜻을 받들어 아들 중대형(뒤 천지왕)이 하카다에 전진 기지 구축, 백제 구원군 편성, 백촌강 대패후 신라군이 처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백제 유민의 기술로 산성을 만들고 大宰府는 그 정청이다.
ㅇ 일본이 신라와 소원해진 이유 : 율령 체제의 강화를 급선무로 하고 있던 8C 일정부가 국내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신라에의 출병계획까지도 세우는 등 긴장관계를 조성해 갔기떠문이다. 834년 이후 신라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으로 전환. *이로 인해 7백명의 신라인 반란(820)
*나라를 야마토 조정이 도읍으로 삼은 것은 710년 우리말의 「나라, 국가」라는 뜻 794년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김.
목차
◈ 고대 일본
◈ 아스카시대
◈ 불교 전래와 발전에 기여함.
◈ 유교의 전파
◈ 하쿠호(白鳳)文化
◈ 騎馬民族 日本國家征服說과 批判
◈ 日국보「백제관음상」「목조반가사유상」
◈ 나라 궁궐터서 신라 안압지 본뜬 연못 발굴
◈ 백제의 왜국 통치 300년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 고대 日本 史書 편찬과 백제인의 참여
◈ 日本 天智王의 新百濟 꿈
◈ 쇼토쿠태자
◈ '日왕실 뿌리는 경북 고령' 쓰쿠바대 마부치 교수
◈ 奈良 平安 시대
◈ '日왕실 뿌리는 경북 고령' 쓰쿠바대 마부치 교수
중앙일보 1999년 6월 30일 고령 = 송의호 기자
"일본 왕의 조상이 살았던 고천원 (高天原) 은 하늘이 아닌 경북 고령 (高靈) 땅입니다. 적어도 일본서기 (日本書紀) 와 고사기 (古事記) 기록이 가공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
29일 경북 고령에 세워진 '고천원 고지' (高天原 故地) 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일본 쓰쿠바대학 마부치 가즈오 (馬淵和夫.81) 명예교수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나의 학설을 받아들인 것에 큰 용기를 얻는다"
고 말했다.
마부치 교수는 일본 고대어 분야의 권위자. 그는 일본 고어를 연구하다 고구려.가야어로 관심의 영역을 넓혔고 10여년 전쯤 고천원의 수수께끼를 푸는 연구에 매달렸다.
그의 연구 토대는 일본 최고 (最古) 의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고사기에서 천손 (天孫) 이 한국에서 건너왔음을 추론했고 일본서기에서는 신라와 가까우면서도 서방에 있는 산중분지라는 지역이 고령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이같은 학설을 4년 전 '고천원 고지' 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가야대 이경희 (李慶熙.75) 총장은 지난해 그의 논문을 읽고 고령땅이 고천원임을 알리는 표석을 학교 안에 세우기로 했다.
마부치 교수는 제막식에 일본 학계 인사 60여명 등 5백여명이 참석하고 일본 왕실의 한 관계자가 "제막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를 희망한다" 는 축전을 보내온 것에 고무된 표정이었다.
"고천원 고지가 가야어 연구를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한.일간 묻혀 있는 고대사도 더 많이 풀렸으면 해요. "
◈ 奈良 平安 시대
ㅇ7C 후반 백제 고구려의 멸망시 이주민 (최대의 이주민 물결)
ㅇ8C 후반∼9C 통일 신라 내부의 사회적 모순에 따라 다시 이주 집단.
ㅇ663년 일의 백제 구원군이 백촌강 싸움서 패배. 665 백제인 관위 수여. 후대(70여명) 大化改新(645) 후의 왕조의 내실화 도모를 위한 일련의 정책
ㅇ8C일본 신라 ; 공적 사절 15회, 신라 일본 ; 공적 사절은 21회 그러나 공적 외교 관계는 779년 이후 끊어짐. 그 뒤의 관계는 규슈의 大宰府중심의 사적 교섭과 무역관계(장보고 등, 圓仁의 입당 구법 순례기에 잘 나타남)
*大宰府(다자이후) : 백제가 망하자 齊明여왕의 뜻을 받들어 아들 중대형(뒤 천지왕)이 하카다에 전진 기지 구축, 백제 구원군 편성, 백촌강 대패후 신라군이 처들어올 것을 걱정하여 백제 유민의 기술로 산성을 만들고 大宰府는 그 정청이다.
ㅇ 일본이 신라와 소원해진 이유 : 율령 체제의 강화를 급선무로 하고 있던 8C 일정부가 국내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신라에의 출병계획까지도 세우는 등 긴장관계를 조성해 갔기떠문이다. 834년 이후 신라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으로 전환. *이로 인해 7백명의 신라인 반란(820)
*나라를 야마토 조정이 도읍으로 삼은 것은 710년 우리말의 「나라, 국가」라는 뜻 794년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김.
목차
◈ 고대 일본
◈ 아스카시대
◈ 불교 전래와 발전에 기여함.
◈ 유교의 전파
◈ 하쿠호(白鳳)文化
◈ 騎馬民族 日本國家征服說과 批判
◈ 日국보「백제관음상」「목조반가사유상」
◈ 나라 궁궐터서 신라 안압지 본뜬 연못 발굴
◈ 백제의 왜국 통치 300년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설
◈ 고대 日本 史書 편찬과 백제인의 참여
◈ 日本 天智王의 新百濟 꿈
◈ 쇼토쿠태자
◈ '日왕실 뿌리는 경북 고령' 쓰쿠바대 마부치 교수
◈ 奈良 平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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