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공업발달은 어떠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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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상 업
(1) 서울상업
(2) 지방상업
(3) 대외무역
2. 수 공 업
(1) 관영수공업의 변화
(2) 민영수공업의 발전
3. 화폐의 발달


Ⅲ.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섯째, 화폐경제의 발달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조장되었다. 이와 같이 사회재부의 분배형태가 특수 계층에 편중되는 것은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균산적 정치이념에 배치되는 현상이었다.
여섯째, 화폐경제의 발달로 고리대업과 관리의 농민 수탈행위가 조장되었던 것인데, 그들의 착취대상이 된 농민의 상당수가 가산과 토지를 잃고 도적이 되는 자가 적지 않았다. 대집단화한 이들의 도적행위와 의식속에는 반지배층 내지 반체제적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일곱째, 화폐경제의 발달로 전통과 인습에 집착하는 속성이 강한 농민들의 보수적 가치관이 실리와 타산을 위주로 하는 실제적이며 진보적 가치관으로 보다 빨리 변질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농민의 상당수가 영리성 위주의 상업적 농경에 힘쓰거나, 보다 많은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상업과 고리대업에 종사하려고 토지를 이탈하고 있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중농정책에 배치되는 현상이다.
여덟째, 화폐경제가 확대 보급되자 물욕에 초연하고 재화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양반자제들의 보수전통적 가치관념상에 발전적 변화가 촉진되었던 것 같다. 이 점은 그들이 종래 보다 영리에 민감하고 축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홉째, 화폐경제가 가족경제내에 침윤됨에 따라서 가족구성원 각자는 이기적 타산에 보다 민감해져서 대가족제도하의 공동체의식이 약화되었다. 이로써 화폐경제의 발달로 말미암아 유교윤리가 지배하는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의 와해가 촉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열째, 화폐경제의 확대 보급으로 문벌이나 정치권력 지향적 속성이 강한 조선사회의 전통적 사회위신척도는 보다 빨리 재부 중심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당시에 발달한 화폐경제는 봉건적 사회신분질서의 변질을 촉진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 열거한 몇 가지 사실들, 즉 화폐경제의 확대 보급으로 촉진된 조선사회의 전통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변질상은 대체로 봉건적 전통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역사발전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조선후기 전통사회질서의 해체를 촉진하면서 확대 발전된 화폐경제는 1860년대, 즉 대원군 집권기에 파격적으로 악화 1866년 10월 우의정 김병학(金炳學)의 제의에 따라 금위영에서 11월 6일 주조, 발행하여 1867년 6월 17일 중지될 때까지 주조총액은 약 1천 6백만 냥이었다. 당백전은 모양과 중량이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당백전 1매의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할 정도로 대표적인 악화(惡貨)였다.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로 전통화폐제도의 문란은 시작되는 것이다.
조선통보
상평통보
당백전
대동전과 당오전
【 결 론 】

유교적 통치 질서속에서 조선 전기의 상업은 정부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고 이 때문에 활발한 상업 활동을 기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전국적 시장망의 부재나 낮은 상품 생산력은 상품 유통을 통한 상인 자본의 확대재생산 자체를 가로 막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 전란 이후, 피지배 계층의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수취 체계의 개편은 이와 같은 조선 전기 상업 구조에 일대 변화를 야기하였다.
특히 대동법의 시행의 효과로 나타난 공인 자본, 사상 자본과 같은 상업 자본의 출현과 성장, 상품 유통을 통한 화폐 경제의 진전, 향시를 통한 전국적 시장망의 형성 등은 상업 발달을 위한 상업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가능케 하였으며, 이는 전통적 농촌 사회내의 분업화와 수공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상업을 통해 피지배 계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즉 농업, 수공업, 상업 등의 분야에서 자본주의의 맹아로 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전통적 신분제에 대한 비판과 실학 사상에 뿌리를 둔 근대적 중상 사상들이 대두되었다.
결국 이와 같은 변화는 계층의 분화를 가져와 조선 사회의 전통적 신분제를 붕괴시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업 자본은 한편으로는 봉건권력과의 결탁을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특권적 정상(政商)이었다. 또한 이들은 상업 독점으로 축적한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기보다 토지에 투자하여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 상업 자본은 근대적 상업과 상업 자본으로 발전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평가할 수 있다.
이와같이 조선후기 사회의 경제구조를 논할 때 생산부문에 대한 연구성과가 일면적으로 경제구조를 규정해 온 것 같다. 조선 후기 사회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면 기본적인 계급관계를 규정하는 생산부문 뿐만 아니라 그에 기초한 유통부문에 대하여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농계층의 발전추이와 그 최종적 귀결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전망되지 못한 것도 상업사연구의 미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지금 조선 후기 상업사 연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 동안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대체로 18세기 이후 봉건상업이 붕괴하고 새로운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며 전기적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상업자본이 부분적으로 생산부문에 투자되어 생산자를 지배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시전체계의 붕괴와 상상체계의 확립으로 정식화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상품유통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상업자본이 봉건권력과 상호관계 속에서 근대적인 상업관계를 밝히는 것이 연구주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상품화폐경제의 존립기초를 해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업사 연구에서 일면을 부각시켜 전체를 규정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상품유통의 실체에 대한 연구의 집적이 필요하다. 즉 구체적으로 상품유통지역, 경로 상인층의 성격이 연구되어야 한다.
※ 참 고 문 헌
姜萬吉, 『朝鮮時代商工業史 硏究』, 한길사, 1984
崔完基, 『朝鮮後期船運業事 硏究』, 一潮閣, 1989
吳 星, 『朝鮮後期 商人硏究』, 一潮閣, 1989
國際文化財團, 『韓國人의 經濟生活』, 김포대학 출판부, 2002
金德珍, 『朝鮮後期 經濟史硏究』, 선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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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1.20
  • 저작시기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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