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 영화 속에서
2) 게임 속에서
3) 과학 속에서
결론
본론
1) 영화 속에서
2) 게임 속에서
3) 과학 속에서
결론
본문내용
ages/press.html#에서 참조.
라고 말하며 죽은 아이의 골수에서 찾아낸 세포를 가지고 새로운 아기를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일들은 디지털이 발전하면서 더욱 활발해 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보편화될 것이다. 아직은 인공 배양을 통해 단 기간 안에 죽기 이전의 성숙 단계로 복제하지는 못하지만, 곧 영화 ‘여섯번째 날’처럼 죽기 전의 성숙단계로 복원해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기 이전의 기억을 뇌로부터 추출하여 다시 만들어진 클론의 눈을 통해 입력시키고, 죽기 전의 생활 패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일까? 그런 세상이 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고, 종교계가 힘을 모아 투쟁을 해야할까? 그렇다고 과연 그 일들이 멈춰질까? 아닐 것이다. 차라리 변하는 세상을 주시하고 그 속에서 정의해야 할 것들을 정의 내려야 할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일까?
결론
성경은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26 상)”이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처럼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처럼 만들어진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리고 왜 형상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왜냐하면 처음의 단어 첼렘()의 어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이 글이 두 가지의 단어가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앞선 첼렘의 경우는 아버지와 아들의 유사한 외모에 대한 언급처럼 신체적 닮음 Gordon J. Wengam, word Bible Commentary 박영호 역 (서울: 솔로몬, 2001), p. 125.
을 말하는 단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구약 성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을 뚜렷이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이나 영혼을 나타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체적 특성만 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 존재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 Ibid. p. 126.
그런가하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단어로 되어있지만,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사상에서 이 본문을 보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실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Waher Brueggemann, Intepretation 강성열 역 (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2000), p. 70.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부어서 만든 어떤 형상을 통해서도 알려지지 않고 특별히 자유로운 역사의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 피조물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Ibid.
는 뜻이다. 그러나 이 또한 혼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이루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류공동체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Ibid., p. 73.
것이다.
성경의 말대로라면 인간을 창조주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사람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스스로가 창조주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것도 덩그라니 혼자 떨어져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두사람, 세 사람이 협력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성경대로라면 클로나이드와 같은 회사에 의해 만들어지든, 복제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함께 더불어 살며 역사의 영역 안에서 존재한다면, 그들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이라든가, 혹은 물론 그 존재는 영적으로, 혹은 육적으로 이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경은 사람을 둘로 나눠서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창조 또한 둘로 나뉘어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 인격적인 통합체로서 그들이 어우러지며 역사를 만들어가고, 함께 생활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서로를 의존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또한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함께 생활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속에서 역사를 이뤄가며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하나의 인간이고 말이다. 하지만 발전하는 과학 속에서 성경의 정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디지털의 발전은 지금 내 자리에 앉아서도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자신이 원한다면 그 지역의 사람과 그 일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조차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사이버 세상은 내 지역을 하나로 정해주지도 않는다. 가상의 세상이지만 내가 존재하는 곳으로 정해져있고, 언제든 그 곳에 들어가면 그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공간의 범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내 나라에서 지구라고 하는 범위로 확장되는 이 시대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발생한 전쟁을 실시간 내 나라에서 목격하며 안타까워하는 시대에, 그리고 죽은 자의 DNA로 다시 그 사람을 탄생시키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잖은가? 게다가 조금 따지고 보자면 성경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원본이 없는 사본에 불과하지 않은가? 인간이란 것 자체가 모두 시뮬라크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무나, 돌에 의한 조각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결국 정의를 내리기에는 성경을 통한 것 밖에는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아날로그의 시대였든, 디지털 시대가 되든, 결국 서로 협력하며, 역사를 만들어가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죽은 아이의 골수에서 찾아낸 세포를 가지고 새로운 아기를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일들은 디지털이 발전하면서 더욱 활발해 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보편화될 것이다. 아직은 인공 배양을 통해 단 기간 안에 죽기 이전의 성숙 단계로 복제하지는 못하지만, 곧 영화 ‘여섯번째 날’처럼 죽기 전의 성숙단계로 복원해 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기 이전의 기억을 뇌로부터 추출하여 다시 만들어진 클론의 눈을 통해 입력시키고, 죽기 전의 생활 패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일까? 그런 세상이 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고, 종교계가 힘을 모아 투쟁을 해야할까? 그렇다고 과연 그 일들이 멈춰질까? 아닐 것이다. 차라리 변하는 세상을 주시하고 그 속에서 정의해야 할 것들을 정의 내려야 할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일까?
결론
성경은 성경은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26 상)”이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처럼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처럼 만들어진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리고 왜 형상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왜냐하면 처음의 단어 첼렘()의 어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이 글이 두 가지의 단어가 다른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앞선 첼렘의 경우는 아버지와 아들의 유사한 외모에 대한 언급처럼 신체적 닮음 Gordon J. Wengam, word Bible Commentary 박영호 역 (서울: 솔로몬, 2001), p. 125.
을 말하는 단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구약 성경은 이러한 방식으로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을 뚜렷이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이나 영혼을 나타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체적 특성만 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 존재의 특성을 나타내야 한다. Ibid. p. 126.
그런가하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단어로 되어있지만,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사상에서 이 본문을 보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실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Waher Brueggemann, Intepretation 강성열 역 (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2000), p. 70.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부어서 만든 어떤 형상을 통해서도 알려지지 않고 특별히 자유로운 역사의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 피조물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Ibid.
는 뜻이다. 그러나 이 또한 혼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이루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류공동체 안에서만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Ibid., p. 73.
것이다.
성경의 말대로라면 인간을 창조주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사람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스스로가 창조주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것도 덩그라니 혼자 떨어져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두사람, 세 사람이 협력하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성경대로라면 클로나이드와 같은 회사에 의해 만들어지든, 복제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 함께 더불어 살며 역사의 영역 안에서 존재한다면, 그들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이라든가, 혹은 물론 그 존재는 영적으로, 혹은 육적으로 이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경은 사람을 둘로 나눠서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창조 또한 둘로 나뉘어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 인격적인 통합체로서 그들이 어우러지며 역사를 만들어가고, 함께 생활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서로를 의존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또한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함께 생활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속에서 역사를 이뤄가며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하나의 인간이고 말이다. 하지만 발전하는 과학 속에서 성경의 정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디지털의 발전은 지금 내 자리에 앉아서도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자신이 원한다면 그 지역의 사람과 그 일에 대하여 토론하는 것조차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사이버 세상은 내 지역을 하나로 정해주지도 않는다. 가상의 세상이지만 내가 존재하는 곳으로 정해져있고, 언제든 그 곳에 들어가면 그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공간의 범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확장되고, 내 나라에서 지구라고 하는 범위로 확장되는 이 시대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발생한 전쟁을 실시간 내 나라에서 목격하며 안타까워하는 시대에, 그리고 죽은 자의 DNA로 다시 그 사람을 탄생시키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도 없잖은가? 게다가 조금 따지고 보자면 성경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원본이 없는 사본에 불과하지 않은가? 인간이란 것 자체가 모두 시뮬라크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무나, 돌에 의한 조각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으로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결국 정의를 내리기에는 성경을 통한 것 밖에는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아날로그의 시대였든, 디지털 시대가 되든, 결국 서로 협력하며, 역사를 만들어가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 위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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