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학습 지도안] 광해군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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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수학습 지도안] 광해군의 정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대한 보답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나?
라.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선택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 광해군이 명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것은 개인적인 책봉의 불만의 표출이란 측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바. 건국 이래의 외교정책의 기본인 친명외교를 포기할 수 있는가?
사. 광해군에 대한 호칭은 바뀌어야 하는가?
아.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해 박해하고 살해한 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자. 광해군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일본 사학계(滿鮮史觀)의 의도적인 측면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차. 진정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원인은 무엇인가?
카. 광해군은 실패한 제왕이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3. 토론 평가지
평가영역
평가항목
A
B
C
내용
자료의 충실성
입장의 일관성
주제의 일관성
태도
설득력
의사 전달능력
토론 매너
보고서
정리 상태
필수 항목 제시
종합평가
4. 학습자료
가.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
명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선왕이 즉위하여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 앉은 적이 없었다. 광해군은 배은 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을 모르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기미년 오랑캐를 칠 싸움에 이르러 장수에게 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일렀다. 우리 삼한 예의의 나라로 하여금 오랑캐와 짐승의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통탄해 본들 어찌 말을 다하겠는가?
조선 시대에 시호 없이 호칭되는 ~군은 부도덕하면서 무능하여 국가와 민생에 커다란 해를 끼친 폭군에게 붙여진다. 이 같은 군주로는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 있었는데 노산군은 약 250년 후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된다. 숙종 전까지의 노산군도 그 칭호만 보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무도한 왕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었듯이 폭정 사실이 두드러진 연산군과는 다소 달랐던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그의 공과에 따라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낸 이유는 위 자료에서 보이듯 첫째, 임진왜란의 은인인 명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과 둘째, 임해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인륜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명을 배반했다는 것은 후에 정묘병자호란을 자초한 정통 성리학자인 서인의 정책과 비교해 볼 때, 떠오르는 후금(후에 청)과 지는 명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표방함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둘째의 경우도 후궁 출신의 광해군이 뒤늦게 적자로 태어난 영창 대군의 지지 세력에 의해 그의 자리가 위협을 받는 속에서 저지른 경우이기에 많은 정권 다툼의 하나로 보아야지 그에게만 인륜의 굴레를 씌어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그게 그렇게 큰 문제라면 태종, 세조, 영조 등도 인륜으로 그 책임을 물어 당연히 시호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간 선조를 대신하여 의병을 독려하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크게 활약했고, 전쟁 후에도 사고의 정비, 동의보감 같은 서적 편찬, 성곽 병기 수리, 양전 사업과 호패 실시 등의 정책으로 복구 사업과 민생 안정을 위해 크게 노력한 업적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즉, 인조를 비롯한 서인 세력들이 정권 탈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광해군으로 깎아 내렸고, 이후 계속해서 서인이 집권는 바람에 복위될 수 없었던 광해군의 공과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광해군은 조선역사상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의 대표이다. 그러나 왕위에서 물러난 뒤 불우하게 한 많은 생을 마감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사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감정적 평가가 아닌 이성에 입각한 정책의 공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역사적 평가를 함에 있어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내치의 재정분야에서 양안과 호적의 재작성을 통해 국가재정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양안과 호적이 소실되어 호구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각종 역과 전세를 부과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후 백성의 생활안정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는 왕조국가의 하나의 폐단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였다.
군사분야에서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정부는 무너진 성곽을 수리하고 무기를 개발하였으며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감행하였다.
의학분야에서는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는 등 백성들의 질병의 예방과 퇴치를 위한 노력도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위기에 처해졌던 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사고를 안전한 산속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내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불타버린 왕궁을 복구하기 위한 과도한 토목공사를 전개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오랜 전란으로 어려워진 민생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커다란 왕궁이 곧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생각으로 재정을 소진하고 민생을 괴롭힌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왕권을 강화한다면 미명하에 형과 동생을 죽이고 비록 계모이지만 부모를 유폐시키고 인륜을 저버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사실을 미화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면 앞으로 어떤 특정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할말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선택하였다. 광해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리외교로 조선이 전란을 겪지 않았다고 하나 그것은 역사의 가정에 불과하다.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역대 유목민족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왔다. 그런데도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후금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인양 설명하는 것은 역사논리의 비약이다. 약자의 편에 서서 역사를 보고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지만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이런 감정을 배제하여야 진정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y

키워드

교수,   학습,   지도안,   광해군,   정치,   중립,   외교,   중립외교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5.04.13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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