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8:1-4 개인 책임론의 대두
1-2 메시지의 도입과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론에 대한 하나님의 문제제기
3-4 공동 책임론의 파기
18:5-24 개인 책임론에 대한 근거제시
5-9 의인의 자격
10-18 책임의 문제에 관한 실례
10-13 의로운 아버지와 불의한 아들
14-18 불의한 아버지와 의로운 아들
19-24 반복되는 개인책임론의 언급
19a 이스라엘의 불평
19b-20 개인 책임론
21-24 돌이킨 자에 대한 축복과 돌이키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
18:25-32 이스라엘의 반응과 하나님의 의지 선포
25-29 이스라엘의 반론에 대한 하나님의 변명
30-32 회개 촉구
1-2 메시지의 도입과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론에 대한 하나님의 문제제기
3-4 공동 책임론의 파기
18:5-24 개인 책임론에 대한 근거제시
5-9 의인의 자격
10-18 책임의 문제에 관한 실례
10-13 의로운 아버지와 불의한 아들
14-18 불의한 아버지와 의로운 아들
19-24 반복되는 개인책임론의 언급
19a 이스라엘의 불평
19b-20 개인 책임론
21-24 돌이킨 자에 대한 축복과 돌이키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
18:25-32 이스라엘의 반응과 하나님의 의지 선포
25-29 이스라엘의 반론에 대한 하나님의 변명
30-32 회개 촉구
본문내용
”의 외형의 고통의 쓰라림은 냉소적이며 그들이 고통당한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공정함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희망없음의 절망과 섞여있다. 삼사대까지 죄를 응징함으로서(출20:5) 하나님의 온전한 찬미와 죄의 오랜 역사(겔16,20,23)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의 끈덕진 예언적 선포(특히 에스겔에서)는 오직 이 희망없음을 강하게 하는데 사용된다.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목소리를 반대한다. 하나님의 공정함에 대해 반항과 의혹을 제기하는 질문자들에 대하여 반대질문을 한다.
에스겔서 18장의 특별한 주안점은 소급하는 감사(audit)에 있다. 명백하게 이것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자신의 죄의 결과의 폭로에 대한 낭패는 에스겔서의 작은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절망의 때(33:10) 그리고 이스라엘의 냉소적인 체념(19:2)을 위한 다급한 메시지가 아니다.
겔18장(그리고 33:10-20)의 중심에는 생명의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예언자가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전의 제사장에 의해 이전에 표현되어진 메시지의 신선한 수용임이 명백하다. 사건으로서 그에게 임한(1절) 이스라엘의 무너짐의 때를 위한 참된 예언자의 말은 유죄선고를 받은 두려운 현재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새로이 확인하도록 시도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그런 “생명”이 예루살렘에서 보았고 들었고 경험한 모든 것과 함께 성전 예배로부터 모든 담보와 지지를 잃어버렸을 때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이 “Yes"라는 선언을 했고, 그의 생명의 힘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 생명의 약속을 예루살렘의 문에서 들음으로서 신의 법의 선언과 함께 이 생명의 약속을 연결할 때,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옛 신실함의 적용이다. 개인에 대한 "생명의 조건“(33:15)은 심판하에 있는 현재 세대에게 생명에 대한 가능성으로서 선언되었다. 죽음의 숙명적인 기대에 대항하여 에스겔은 단순한 생명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접근한다. 이것은 전에 성전에서 개인에게 선언되어졌다. 이제 이것은 ”새 마음과 새 영“(v31)의 요청의 수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선조들로부터의 죄의 저주에서 옮겨져 생명에로의 요청이다. 하나님은 항상 나의 세대와 함께 하신다
더욱이 그는 나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과거 죄의 무거운 짐에 의해 지워진 희망 없어 보이는 척도로 여겨지는 어떤 운명론은 생명의 열린 문에 입장으로의 요청에 의해 깨어진다.
이 모두는 단지 현재를 고찰하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할 수 있는“God of the present day"에 결정의 신학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현재에 심지어 죽음이 선고된(32절) 이에 대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변하지 않는 표현이다. 책망하는 질문에서 하나님은 그가 사악한자의 죽음을 기뻐한다는(23절) 어떤 관념도 거부한다. 이것이 32절에서 되풀이될 때, 우리는 질문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진다. 현재에서 생명으로의 하나님의 요청은 생명(16:6)에로의 그의 최초의 요청으로부터 유래하고 그의 자유, 주권자, 그리고 창조적인 말씀(37:1-14)에 의해 그의 백성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형시킨 그의 마지막 행동으로 확장된다. 시작과 끝의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증에서, 에스겔 18장은 현재로의 소환을 촉구한다.
이 소환은 단순히 이상에로의 초대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반드시 숙달되어짐으로 이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섬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 생명의 보증의 경청인 생명에로의 초대이다.
이것은 심판아래에서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신실함을 공표하는 어디든지 반드시 선언되어지는 생명에로의 돌아섬이다.
신학적 메시지
안 되면 조상 탓(2-4절)
유다 백성들은 아비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모든 영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그 영혼이 죄를 범하느냐, 의를 행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도 있다고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모든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담고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라 할지라도 그 안에 의로운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기를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치 아니하고(10절)
죄의 결과는 심각하고 오래까지 계속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변덕스러워 그들의 조상의 악한 태도 때문에 무죄한 자를 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죄는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개인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의로운 아버지 때문에 때로는 악한 아버지 때문에 그 아들의 심판까지 소급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개인적 책임 윤리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30-32절)
유다 백성들을 계속해서 설득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단호하게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할 테니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차원 더 나아가서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바울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롬 12:1-2).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후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총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목소리를 반대한다. 하나님의 공정함에 대해 반항과 의혹을 제기하는 질문자들에 대하여 반대질문을 한다.
에스겔서 18장의 특별한 주안점은 소급하는 감사(audit)에 있다. 명백하게 이것은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자신의 죄의 결과의 폭로에 대한 낭패는 에스겔서의 작은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절망의 때(33:10) 그리고 이스라엘의 냉소적인 체념(19:2)을 위한 다급한 메시지가 아니다.
겔18장(그리고 33:10-20)의 중심에는 생명의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예언자가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전의 제사장에 의해 이전에 표현되어진 메시지의 신선한 수용임이 명백하다. 사건으로서 그에게 임한(1절) 이스라엘의 무너짐의 때를 위한 참된 예언자의 말은 유죄선고를 받은 두려운 현재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가능성을 새로이 확인하도록 시도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그런 “생명”이 예루살렘에서 보았고 들었고 경험한 모든 것과 함께 성전 예배로부터 모든 담보와 지지를 잃어버렸을 때 일어난다. 하나님은 그이 “Yes"라는 선언을 했고, 그의 생명의 힘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 생명의 약속을 예루살렘의 문에서 들음으로서 신의 법의 선언과 함께 이 생명의 약속을 연결할 때,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옛 신실함의 적용이다. 개인에 대한 "생명의 조건“(33:15)은 심판하에 있는 현재 세대에게 생명에 대한 가능성으로서 선언되었다. 죽음의 숙명적인 기대에 대항하여 에스겔은 단순한 생명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접근한다. 이것은 전에 성전에서 개인에게 선언되어졌다. 이제 이것은 ”새 마음과 새 영“(v31)의 요청의 수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선조들로부터의 죄의 저주에서 옮겨져 생명에로의 요청이다. 하나님은 항상 나의 세대와 함께 하신다
더욱이 그는 나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과거 죄의 무거운 짐에 의해 지워진 희망 없어 보이는 척도로 여겨지는 어떤 운명론은 생명의 열린 문에 입장으로의 요청에 의해 깨어진다.
이 모두는 단지 현재를 고찰하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할 수 있는“God of the present day"에 결정의 신학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현재에 심지어 죽음이 선고된(32절) 이에 대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변하지 않는 표현이다. 책망하는 질문에서 하나님은 그가 사악한자의 죽음을 기뻐한다는(23절) 어떤 관념도 거부한다. 이것이 32절에서 되풀이될 때, 우리는 질문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진다. 현재에서 생명으로의 하나님의 요청은 생명(16:6)에로의 그의 최초의 요청으로부터 유래하고 그의 자유, 주권자, 그리고 창조적인 말씀(37:1-14)에 의해 그의 백성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형시킨 그의 마지막 행동으로 확장된다. 시작과 끝의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증에서, 에스겔 18장은 현재로의 소환을 촉구한다.
이 소환은 단순히 이상에로의 초대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반드시 숙달되어짐으로 이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섬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 생명의 보증의 경청인 생명에로의 초대이다.
이것은 심판아래에서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의 신실함을 공표하는 어디든지 반드시 선언되어지는 생명에로의 돌아섬이다.
신학적 메시지
안 되면 조상 탓(2-4절)
유다 백성들은 아비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모든 영혼이 다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그 영혼이 죄를 범하느냐, 의를 행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도 있다고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모든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담고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라 할지라도 그 안에 의로운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에게서도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기를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치 아니하고(10절)
죄의 결과는 심각하고 오래까지 계속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변덕스러워 그들의 조상의 악한 태도 때문에 무죄한 자를 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죄는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개인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의로운 아버지 때문에 때로는 악한 아버지 때문에 그 아들의 심판까지 소급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개인적 책임 윤리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30-32절)
유다 백성들을 계속해서 설득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단호하게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할 테니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차원 더 나아가서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바울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롬 12:1-2).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후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은총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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