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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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序 論

Ⅱ.本 論
ⅰ. 금융위기의 개념
ⅱ. IMF 구제금융의 원인
ⅲ. 구제금융의 영향 - 경제일반
ⅳ. 구제금융의 영향 - 자금시장
ⅴ. 금융구조조정 내역

Ⅲ.結 論

본문내용

다. 이 같은 집강소의 설치 운영은 전라도에 국한된 것이었고 또한 일시적인데 그쳤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집강소는 농민들이 자신의 힘과 의지로 지방 단위에서나마 행정력을 장악하고 이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집강소를 통한 농민의 권력 참여는,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형태였다고 할지라도, 한국 근대사의 새 장을 연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집강소의 운영은 농민혁명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할 만하다.
Ⅴ. 9월 재봉기.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
1894년 6월부터 전개된 복잡다단한 사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씩 그 결과를 드러냈다. 청 일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갔다. 조선의 정권은 개화세력이 쥐었고, 이들은 개혁을 단행했다. 청군이 물러나고 농민군의 1차적 적이었던 민씨 세력도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위기는 더욱 깊어 갔다. 조선정부를 장악하고 청군마저 축출한 일본이 내정간섭과 침략의 강도를 높여 갔기 때문이다 전라도 일대에 세력을 보존하고 있던 농민군은 그런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정국은 필연적으로 일본과 농민군의 대결, 그 하나의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9월초 농민군이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재봉기함으로써, 조선의 미래를 결정지을 일대 격전이 시작되었다.
1. 재봉기 결정과 준비
일본군의 내정간섭에 맞선 각지 농민군의 공격적인 활동에 호흡을 같이 한 것은 김개남이었다. 7월 하순부터 임실에 머물며 집강소 체제에 협조하던 김개남은, 8월 19일 남원 교룡산성 등의 병기고를 헐어 군기를 장악하고 부호의 돈과 곡식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25일에 다시 남원에 들어왔다. 그는 동헌을 도회소로 삼는가 하면 체제를 정비하고 무장을 강화해 갔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라좌도 일대에서 7 8만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김개남이 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전봉준은 집강소 체제를 유지하며 농민군의 역량을 보존하는 가운데, 중앙정국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편 것이다. 그러나 김개남은 전봉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또한 손화중의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과 차이를 보이며, 재봉기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전격적인 재봉기 결정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대원군의 밀사파견과 밀지 전달이다. 대원군은 비록 일본군의 등에 업혀 정계에 복귀했으나, 그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며 삼남에서 의병을 불러오는 방안 등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의 권고 등으로 농민군에게 '해산하라'는 효유문을 내리는 때를 이용하여, 8월 25일경 전라도의 농민군 등에게 밀지를 비밀리에 내려 보냈다. 삼남 각처의 양반과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같이 창의(倡義)하여, 일본군을 치고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다. 밀지는 전라도의 일부 유림에게도 전달되었으나, 유림들은 농민군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며 호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로써 대원군은 농민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원군의 밀지는 7일 남원의 김개남에게 전달되었고, 전봉준도 삼례로 나와 밀지를 전달받았다. 이후 전봉준은 손화중 등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본격적으로 재봉기 채비를 갖추어 갔다. 이처럼 전봉준이 재봉기를 결정지은 계기 역시 대원군과의 연합이 구체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 9월 재봉기의 근본적인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내정간섭 심화였고, 제1의 일본군 축출이었다. 전봉준과 김개남은 8일경 재봉기를 서둘러 확정짓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각지에서 무장한 농민군은 전봉준과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 전라도의 농민군 10만 여명은 3월 봉기 때와 비슷하게 전봉준과 김개남의 세력으로 형성되었다.
2. 전국 각지의 봉기와 전투
9월초 전라도에서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재봉기하고, 이어 충청도에서 농민군이 총봉기하였다. 이들 봉기를 앞뒤로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에게도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9월 재봉기 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힘을 합쳐 북상 길에 올랐고, 이와 별도의 조직을 이룬 가운데 경상, 강원, 경기, 황해도의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사실상 조선 전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봉기한 농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반일(反日)항쟁을 전개하는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강력한 사회개혁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9월 재봉기 당시에는 조선 전역은 항일구국 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의 물줄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Ⅵ.결론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으나 역사 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 1894년 농민전쟁은 중세사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둘째는 조선 후기 이래 진행되어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총결산이자 근대 민중항쟁의 출발점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셋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극복을 위해 투쟁하였던 반침략 반외세 투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수많은 농민들의 참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만 농민전쟁의 패배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세의 간섭을 들 수 있다. 1차 봉기 때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중동에서 중단되었으며, 그 목적 자체가 외세의 축출이었지만 끝내는 그 외세에 의해 진압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둘째는 개화파가 농민군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여 진압에 나선 것이었으며, 셋째는 농민군축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농민군축의 이념상의 미숙성, 통일적인 지휘체계와 조직력의 미흡, 농민군의 전략 전술상의 미숙함, 무기의 열세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적인 중세사회를 마무리 짓기 위한 총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다.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가 강제되었을 때 이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반일투쟁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반일의병전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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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19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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